명왕성-속눈썹 짙은 눈

방민호의 <문화칼럼>

등록 2002.09.11 03:04수정 2002.09.11 11:28
0
원고료로 응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밤이었다. 잠깐 눈 붙이고 나니 지금은 새벽, 사위 고요하고 머리는 거짓말처럼 맑게 갰다. 잠 들기 전에 흐린 의식으로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명왕성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도 그렇게 만나기 어려울 수가 없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 연거푸 자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연이 겹쳐 보기 싫은 사람도 자꾸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리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려 해도 만나지지 않건만. 사람살이는 이상하다.


얼마 전에 내가 너무 오랫동안 별을 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에 두 권짜리 천문학 개론서를 사서 그중에 은하 부분과 태양계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대목은 모르는 채로 그냥 읽는 것이다. 그때 새삼스럽게 신기해 보인 별이 바로 명왕성이다.

1930년에 발견된 이 별은 공전주기가 너무 길어 아직 그 4분의 1도 다 돌지 못했다고 한다. 공전주기가 자그만치 248년이니 그럴 수밖에. 그리고 자기보다 작기는 하지만 다른 행성이 거느린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위성을 갖고 있고 그 자전 방향도 다른 태양족과는 다르다. 또 본래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은 거대한 행성인데 그에 비하면 명왕성은 너무나 작아서 그 별이 왜 태양계의 맨 바깥 쪽을 이상한 타원형을 그리면서 돌게 되었으며 왜 태양의 중력장을 벗어나 우주 고아가 되지 않았는지도 수수께끼라고 한다. ]

별의 지름은 지구 5분의 1정도밖에 안 되고 밀도까지 희박해서 질량은 지구의 달보다도 작다. 마지막으로, 돌다가 해왕성 궤도 안쪽으로까지 들어오기도 해서 마치 혜성이나 소행성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인데, 오늘 텔레비전에서는 명왕성이 천왕성과 해왕성 같은 거대한 얼음별이 생성되는 과정을 해명해줄 열쇠를 갖고 있다고 했다. 얼음 행성을 만들어내는 지대가 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목되는 사실은 2003년에 탐사 우주선을 보내면 그가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막막한 우주를 홀로 비행하여 이 수수께끼 별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

태양족이 되기에는 너무 작은 별, 그 존재조차 희미한 별, 발견된 이래 아직까지 태양 주위를 반 바퀴도 돌지 못한 너무나 먼 별, 플루토(Pluto)라는 핼쓱한 서양 이름을 가진 별. 어느 틈에 나는 이 별을 좋아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 번 만나면 자꾸 만나게 된다고, 뜻밖에 며칠 전에 탐라에 가서 또 명왕성을 만나게 되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요배라는 화가. 그는 지금 51세, 제주 4·3 그림을 그리다가 제주로 내려가 그곳 자연을 그리게 된 지 10년. 그는 귀덕이라는 한적한 곳에 작업실을 꾸미고 그림과 술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작업실 한 구석 이젤에는 들꽃과 바람이 어우러진 한 폭의 유화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자기는 명왕성 같은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태양계의 가장 먼 바깥 세계를 외롭게 살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말없이 바라보는 존재가 되겠노라고. 사람이 왜 늘 중심에서 살아가야 하느냐고, 자기는 이 제주 산야에 묻혀 명리를 버리고 살아가겠노라고.


그분과 나를 포함해 몇 사람이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분은 남은 맥주병 하나를 곱게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가까운 바다로 나갔는데 거기서 다시 제주산 소주 한라산 몇 병을 나와 현기영 선생과 함께 비워버렸다.

술에 젖은 명왕성이라….
그러나 나는 그 핼쓱한 이름을 가진 별을 좋아하기로 했으니 할 수 없다.

그분과는 달리 나는 태양족 세상 바깥으로 항해를 꿈꾸되 지구에 붙밖힌 존재. 그러나 내일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있어 광막한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쉽게 재단할 수 있겠는가.

명왕성.
없는 듯하되 분명히 거기 있어 태양족 세상을 지켜보는 속눈썹 짙은 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