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귀농지에서 추석을 쇠어야지

[추석특집] 막내가 꾸미는 갸륵한(?) 음모 하나

등록 2002.09.16 15:54수정 2002.09.1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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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을 앞두고 나는 아주 특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색다른 추석 쇠기를 꿈꾸고 있다. 작년처럼 미수에 그칠지 모르지만 왠지 이번추석은 내 마음의 거처를 따라 이곳 귀농지에서 추석을 쇠고 싶은 것이다. 네 형제 중 막내인 나 하나 빠지는 게 어떠랴 싶기도 하지만 형님들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명절 때가 되면 생기 넘치는 시골

추석명절 때마다 역귀경길, 서울 가는 길이 해를 거듭할수록 번잡스러워진다. 집에 있는 가축도 걱정 되고 밭에 거둬들이다만 곡식들도 마음이 안 놓여 서울 큰형님 댁에서의 추석 차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귀향을 하는 반복에 민속명절의 정취를 찾을 수가 없다.

털다 만 참깨. 마당에 말리다 말고 덮어놓은 고추. 옆집에 부탁을 해 놓았지만 닭이나 개가 제때 식사를 하는지 항상 조바심을 친다. 모두 다 귀농지의 식구들이다.

호박이니 깻잎이니 참기름, 들기름, 고구마에 감자 등속을 상경하면서 챙긴다고 챙겨도 막상 추석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빠뜨린 게 많아 시장에 나가서 사오기 일쑤다.

언젠가부터 시장음식을 먹기가 께름칙해졌다. 7년째 비료 한 톨 농약 한 방울 안 치고 농사를 지어오면서 생명이 되는 먹을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몸으로 알게 되고 나서부터다. 추석에 배탈이라도 나면 과식을 탓하기보다 나는 별 혐의도 없는 '도회지음식'을 트집잡는다. 이럴 때면 절로 시골집이 생각난다.


무엇보다도 올 추석에 꾸미는 나의 음모(?)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딴 데 있다. 아랫녘에 고향을 둔 친구들이 추석을 쇠고 상경하면서 우리 귀농지에 들러 하루 이틀 쉬었다 가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되어 있어서이다. 이곳의 귀농학교 출신 동문들이 모여 윷놀이판을 벌이기도 한다.

서울로 귀가하는 친구들이 쉬었다 가는 곳


작년에는 세 가정이 몰려들었다. 고향 부모들이 애지중지 마련해준 곡식이나 추석음식들을 우리 집에 풀어헤쳐놓고 남도음식 경연대회를 하는 꼴이 되었다. 내가 그들보다 더 늦게 집에 도착했는데 친구 가족들이 먼저 터를 다지고 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친구는 굴과 멍게를 두 상자씩이나 싣고와서 마당에서 굽고 있었다. 경남 함양이 고향인 친구는 쌀가마니를 풀어 햅쌀을 한 되박씩 나누면서 '어머님 죄송합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라고 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밥상머리에서 반찬마다 내력을 설명하느라고 아내는 입에 밥 떠넣을 시간이 없다. 젓가락으로 이것도 집어 보고 저것도 집어 보면서 친구들은 장단을 맞춘다.

추석 때면 골목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노는 소리에 시골 동네가 회춘한 느낌이다. 20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에 쇠락한 노인들만 낙조처럼 지내다가 이때가 되면 수명을 다해가는 지게와 괭이와 호미들마저 기가 살아 동네가 후끈거린다.

마을 어귀마다 늘어선 서울, 경기, 인천 번호판을 단 자동차들. 이미 남이 되어 버린 장성한 손주 손녀들끼리 차를 남의 집 앞에 대었느니 어쨌느니 하며 가벼운 입씨름까지 벌어지는 꼴을 보면 사람 사는 맛이 절로 난다. 들판을 어슬렁거리던 도둑고양이들도 대놓고 길거리로 나와 외지의 방문객들이 흘리는 음식들로 포식을 한다.

가을걷이와 가축들도 집을 비우지 못하게 한다.

맞다. 작년에는 앞집 막내아들이 추석에 고향 다녀가면서 쇠말뚝을 가져다가 길가에 난 자기네 밭에 텅텅 박아붙이고 가서 그 뒤로 동네가 시끄러웠었다. 밭주인하고 동네 이장하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쇠말뚝이 길가 땅을 잡아먹었네 말았네 하는 것이 발단이었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쇠말뚝에 긁히는 일도 있었다. 그 철없는 막내아들 눈에는 자기네 땅에 남의 차가 받쳐져 있는 것이 눈뜨고 볼 수 없었던가 보다. 눈길 가닿는 모든 산천초목이 다 자기 것이고 파란 하늘도 하얀 뭉게구름도 죄다 가져도 누구 시비 거는 사람 없는 시골마을에서 왠 쇠말뚝인가 싶었지만 도시인이 되어버린 극성맞은 효심은 이렇게 삐뚤어져 나타나기도 한다.

마을회관이 붐비는 것도 이때다. 나는 작년에 시내에서 빔 프로젝트를 빌려다가 영화를 상영했었다. 임권택 감독의 '츈향뎐'을 틀었는데 성황을 이루었다. 누구네 집이건 비디오플레이어가 없는 집이 없지만 마을회관에 함께 둘러앉아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식자랑 음식자랑하는 재미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다.

어릴 적 시골로 도는 가설극장 생각이 나는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을 경쟁적으로 떠드느라 영화는 딴전이었다.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떠들어대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는다.

마을회관에서 튼 영화

돌아가는 친구들의 자동차에 마루에 있던 늙은 호박이랑 여름날 땡볕아래 담가두었던 산채효소니 매실효소를 한 병씩 실어주고 나면 내 추석은 비로소 끝난다.

새벽에 밭에 나가 배추밭 배추벌레 몇 마리 잡은 것 가지고 김장배추 실으러 온다고 큰소리들도 치고 시골에 집 한 채 짓고 너처럼 살겠다고 올 때마다 다짐을 놓고 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멍쩡히 도회지에서 잘 사는 친구들이 나는 늘 정겹다.

올해는 집에서 추석을 맞이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내년부터는 추석명절 차례상은 우리 집에서 모시고 싶다. 차라리 하루 전에 서울로 올라가서 어머님을 뫼시고 내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형제들을 우리 집으로 모셔서 추석을 쇠고 싶은 것이다. 명절 음식을 자시러 오시는 조상님들도 해마다 달라지는 복잡한 서울거리에서 수입 농산물로 제사상 받으시는 것보다야 우리 집에 오시는 걸 더 반길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가톨릭잡지 [레지오 마리애]에 실린 글을 일부 손질한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가톨릭잡지 [레지오 마리애]에 실린 글을 일부 손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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