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반란이 너를 아름답게 하기를

가을 수업 이야기

등록 2002.09.17 14:44수정 2002.09.2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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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자
오늘은 영어 수업이지만
모국어를 배우자
아, 모국의 하늘을 바라보자

가을
영어로는 '폴'
혹은 '어텀'
어느 것도 가을스럽지 않구나

오늘은 모국어를 배우자
가을―
입 안에 양칫물이 남아 있었니?
아니면, 꽈리를 깨물었니?

가을
가실
갈…갈바람

아이들아
오늘은 모국어를 배우자.
-졸시, '가을 수업'


해마다 해 온 가을 수업을 올 해는 못하고 있습니다. 3학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절반은 현장 취업을 나가 학교에 없고, 나머지 절반은 수능시험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터에 가을 수업을 한다고 부산을 떨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을 수업을 못하는 아쉬움은 작년에 만난 아이들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복도에서 만나면 무언가 그립고 아쉬운 눈빛으로 지난 가을 수업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가을 수업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인지, 저는 걷고 있는지 서 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귀가하여 손발을 씻고 서재로 들어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작년 아이들이 가을 수업 시간에 남긴 편지들입니다. 하얀 종이에 붙어 있는 형형색색의 낙엽들이 제 손에 닿자 바스락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낯익은 이름들….


가을 수업은 일종의 반칙입니다. 영어시간에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모국어로 편지를 쓰거나, 가슴에 맺힌 은밀한 이야기들을 하얀 백지 위에 쏟아놓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잠을 자지만 않는다면 한 시간 내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업시간에 몰래 하던 것들을 아예 시간을 주어 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가을수업은 아이들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시간입니다. 오로지 밖에 있는 지식을 안으로 집어넣는 일에만 익숙해 온 아이들은 갑자기 맞닥뜨린 자신만의 시간이 조금은 어색하고 무엇을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기도 하지만,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수업 의도를 잘 말해주면 곧 수긍을 하고 편안한 얼굴이 됩니다.


반칙의 효과는 언제나 기대나 상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가을 수업을 마치고 난 다음 날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뭔가 소중한 것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그런 내밀한 눈빛을 저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몇 아이는 수업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잘 포착하여 칭찬을 해주거나 꾸준한 관심을 보여주면 잘못 잡혀진 오랜 습관을 스스로 고쳐나가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 교육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안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학급당 학생수가 우리의 경제적 수준에 걸맞도록 더욱 조정되어야 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아이들을 자기 삶의 주체적 동기를 지닌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을 수업을 통해 친해진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작년에는 복학생으로 뒤늦게 들어온 혜정이가 저를 많이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혜정이는 제 작년에 입학식에만 참석하고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가 작년에 복학하여 저와 인연을 맺은 아이입니다. 머리를 귀밑 3cm로 규정한 교칙을 준수해야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서약서에 끝내 도장을 찍지 않고 학교를 그만둔 것입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는 자신이 어렸지만, 당시의 결정에 후회는 없다고 했습니다.

혜정이는 교복만 벗겨놓으면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성숙해 보이지만 대화를 해보면 역시 아이입니다. 그렇다고 철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아이의 순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학교에 오기도 했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그것만이 문제였는데, 그 아이의 그런 돌출행동으로 인해 담임인 제가 감당해야 하는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모든 것이 쉽게 풀렸습니다. 다음은 혜정이가 남긴 가을 편지입니다.

낙엽에게

안녕! 첨으로 너한테 쓰는 편지다! 넌 정말 아기의 손가락 같구나. 난 너무 궁금해. 너만의 생각이 있을지. 만약에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암튼 넌 가을이라는 계절에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낙엽'이라는 이름을 가진 게 좋겠다. 너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지어본다면, '영원'이라고 불러주고 싶어. 넌 내가 죽을 때까지라도 1년에 한 번은 꼭 볼 수 있으니까 영원하잖아!

나에게

너한테도 첨으로 쓰는 편지야. 기분이 어리둥절+몽롱하다. 난 항상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나의 첫 인상! 만약에 나와 같은 아이가 내 옆에 있을 때 난 그 아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넌 근데 너무 욕심이 없어. 나쁜 욕심이 없는 것은 좋지만. 그래. 이건 욕심이 아니라 의욕이라 해야겠다. 암튼 더 적극적인 혜정이란 아이가 됐음 좋겠다.

그리고 네가 이 세상에 없을 때는 너의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줄 너의 이미지! 그러니까 내 말은 잘 하란 말야! 넌 성공하는 건 별 관심 없잖아. 노력만 해봐. 하나님은 널 버리지 않을 테니까.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 항상 노력하며 살았음 좋겠다.

준철씨에게

이제 겨우 몇 달이면 선생님과 자주 만나지 못하겠네요. 제가 첨으로 선생님을 뵌 것이 생각나네요. 학기초라서 교실 환경정리를 하느라고 선생님의 양복에 먼지가 묻은 채 저에게 오셔서 "오, 예쁘게 생겼네!" 하신 첫 마디!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남자 담임 선생님은 첨이라서 기대 반 떨림 반으로 시작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헤어짐이라는 게 익숙해지네요. 저 자신도 제가 이렇게 까지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할지 생각도 못했었어요! 만약에 선생님이 아닌 다른 분을 만났다면 제가 현재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었을지…

이제 저 삼분의 일 왔어요. 남은 시간 지금처럼만 채워 나갈께요. 저의 예전 모습을 이젠 찾아낼 수도 없을 것 같아요. 항상 노력하면서 살께요. 걱정하지 마시구요. 제가 졸업식 날 선생님께 졸업장을 받는 날까지 참고, 노력하고, 열심히 할께요. 건강하세요.


혜정이는 지금 학교에 없습니다. 2학년으로 진급하고 며칠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 두고 지금 학원을 다니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와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혜정이를 탓할 마음은 없습니다. 물론 잘한 일이라고 두둔할 일은 더욱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유난히 학교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 아이의 개성일 수도 있고 약점일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것을 넉넉하게 안아주지 못하는 현실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이제 며칠 뒤면 혜정이의 생일이 돌아옵니다. 학교를 그만 둠으로써 다시 그 아이의 담임이 된 저는 전화를 걸어 생일도 미리 축하해주고, 내년 4월에 있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담임다운 잔소리도 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음색으로 판단하건대 시효가 지난 옛 담임의 간섭을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특별히 혜정이를 아끼는 것은 자유를 사랑하는 그의 영혼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방종이라는 말로 낮추어 말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는 자유를 알고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 스스로 질 것입니다. 혜정이는 그런 아이입니다.

저에게는 혜정이가 자신의 출세와 성공만을 위해 살지는 않으리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본문에 나온 contribution(공헌, 기여)이란 단어를 설명하다가 이런 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지역에 대학입시 지망생이100명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 중 20%인 20명이 자기 진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출세와 성공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사회의 공익을 위해 공헌할 생각을 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아직 그러지 못합니다. 국가와 사회을 위해 공헌해야할 정치인들이 개인의 사익에만 눈이 멀어 있고, 우리의 교육부터가 그런 아름다운 사람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서 그런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때 저를 뚫어지라고 바라보던 혜정이의 눈빛을 저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입검정에 합격하여 대학에 입학하는 날, 저는 혜정이를 만날 생각입니다. 어떤 제약 때문에 나누지 못했던 인생과 사랑에 관한 폭넓은 대화들을 그와 나누고 싶습니다. 자유롭게, 아주 자유롭게 말입니다. 그날이 어서 빨리 와주기를 저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너의 자유를 위하여

언니 18번째 생일을 축하해요~
혜정 언니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아이들이 너를 언니라고 부르는구나
그 모습이 하도 좋아서
나도 가끔은
널 언니라고 부르고 싶을 때가 있었지

기억나니?
너를 복학생으로 맞이하던 그날
학교가 1년 늦어진 것은
귀밑 3센티의 두발 규정 때문이었다고
그 시절의 철없음은 인정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

하지만 혜정아,
네가 1년이 늦어진 것은
꼭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구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연의 끈으로 묶어주시려고
너로 인하여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려고

가을 수련회 때 나는 보았지
섹시하게 배꼽을 내어놓고
춤을 추던 너의 뜨거운 정열을!
너의 갈망을, 너의 자유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하거라
너무 빨리 변하지 말거라
모범답안을 베끼려 하지 말거라

다만 바라기는
태풍이 바다를 썩지 않게 하듯이
너의 자유의 반란이 너를 구원하기를
너를 아름다운 사람이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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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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