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나는 지고 너는 피어나고

이 가을에 아들과 함께 책을

등록 2002.09.24 07:26수정 2002.09.2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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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법 읽었네! 네홀류도프가 카츄사 범했니?"
아침 운동 나갈 시간이 되어 아들아이의 방을 들렀다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을 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깨알같은 글씨가 촘촘히 박힌 장장 450여쪽에 달하는 책이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간 상태로 펼쳐져 있는 것이 내심 반가웠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통속 소설도 아니고, 더욱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다니. 나는 화살이 떠난 뒤에야 아차 싶었는데, 그 화살을 맞은 아들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빠, 일주일 전에 똑같은 질문을 제게 하신 거 아세요?"
앵? 그런데 평소 같으면 한참 꿈속을 헤매고 있어야 마땅할 아내가 오늘따라 일찍 잠을 깼는지 얄밉게도 나의 아픈 곳을 찌릅니다.

"너희 아빤, 부활을 읽고 그 장면만 기억 나시나 보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아내의 말에 승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당신도 그 장면을 읽었으면 알겠지만,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요. 그래서 그런 거지, 내가 무슨?"

아침 '부활' 사건은 그 쯤에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표정도, 그저 한 마디 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돌아가 있었고, 농구공을 든 채 건중건중 서너 걸음 앞서 가는 아들아이의 거동을 보아도 별 탈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운동장 다섯 바퀴를 걸어서 돌고, 두 바퀴를 뛰어서 돌고, 물방울이 서린 철봉에 매달리기 위해 발에 힘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까지도 저는 한 가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네홀류도프와 뭇사내들에 의해 파괴된 카츄샤의 영혼이었습니다.

"썩었어. 이 말 기억나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시베리아까지 찾아가 카츄샤를 만난 뒤에 네홀류도프가 혼잣말로 중얼거린 소리야. 그 전에 카츄샤가 남자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면서 서서히 영혼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지지. 한 인간의 순간적인 잘못이 타인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소름이 끼치도록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지. 아까 네홀류도프가 카츄사를 범했냐고 물었던 거, 그건, 네가 부활을 얼마나 읽었나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알지?"

결국, 저는 이런 장황한 설명 끝에 구차한 변명까지 달고 말았는데, 나의 조바심에 부메랑처럼 돌아온 아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알아요. 그런데 아빠, 지금 하신 말 지난주에 저에게 하신 거 기억 안 나세요?"


그, 그랬니, 내가?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아들의 눈에서 내가 본 것은 어떤 연민의 빛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얼른 그의 눈을 피하고 말았는데, 대신 나의 시선은 작은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는 철봉대로 급히 옮아가 있었습니다. 마땅히 눈길을 줄 만한 곳이 없기도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물방울이 맺혀 있는 철봉대에 매달리느냐 마느냐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던 것입니다.

철봉대의 검은 금속에 서린 맑은 물방울은 내가 철봉대로 뛰어오르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 사이에 내린 맑은 이슬 같기도 하고 빗방울 같기도 한 작은 물방울 때문에 허리에 좋다는 철봉 매달리기를 건너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유리 허리에 모험은 금물이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뛰어 매달린다면 물방울쯤이야. 뛰어보자. 그래, 뛴다. 뛴다. 아, 손에 닿았다. 잡았다. 성공!


사람도 기계처럼 때가 되면 마모되거나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내가 막 마흔 살이 되던 바로 그 해의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의 나이만 같던 나이 마흔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한 것도 육체의 허망한 퇴락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줌발이 턱도 없이 시들해지면서 멀쩡하던 눈에 슬슬 눈곱이 끼기 시작하더니 종일 몸을 쉬어줘도 어깨가 쏟아져내리는 견비통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이듬해부터는 이태걸이로 허리병을 앓게 된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와 시기가 비슷합니다.

얼마 전 일입니다. 아내가 아들아이의 몸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여보, 얘도 당신처럼 허리가 길어요. 봐요. 한참을 가도 아직 허리예요."

허리디스크와 가는 허리와의 함수관계에 대해서는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날 아내의 위대한 발견은 아들아이의 아침 공부가 아침 운동으로 바뀌어지는 위대한 변화를 가져왔고, 덕분에 나는 아침 운동의 파트너를 얻게 된 셈이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풀밭 속에 핀 달개비꽃을 아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녀석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느닷없이 "제제"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아이가 눈을 둥글게 떴다가 내 표정을 금세 읽더니 하얗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어제 읽으신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때문에 절 제제로 착각하신 거죠?"

그랬습니다. 아들 말대로 어제 그 책을 읽은 것입니다. 아들은 '부활'을 읽고 아버지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는다고, 아내는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제라니? 그럼 나는 뽀르뚜까? 나는 갑자기 아들과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뽀르뚜까는 왜 꼭 죽어야 했을까? 너무 슬프잖아. 그 아이에겐 뽀르뚜까가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왜 작가는 뽀르뚜까를 좀더 제제 곁에 두지 않았을까? 왜 그런 큰 슬픔을 제제에게 안겨주었을까?"
"……."

"제제는 그를 잃은 너무도 큰 슬픔으로 인해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옛날처럼 장난만을 일삼기에는 너무도 큰 슬픔 때문에 말이야. 그러니까 제제를 키운 것은 바로 슬픔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한참 말을 하다가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뿔싸, 나는 아들의 눈에서 조금 전에 보았던 연민의 빛 같은 것을 다시 보고 만 것이었습니다. 낭패감이 들었지만 곧 웃음을 띠며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곧 몸이 만들어지면 몸 안에 든 소프트웨어들도 되살아날 거야. 그리고 아들아,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되어 모든 것이 다 망가진다고 해도 신이 주신 진실한 마음과 너를 향한 사랑만 남아 있으면 돼. 그러니 대답해 봐. 언제니? 내가 언제 이 말을 한 거니? 어제 밤이었니?

제가 눈으로 묻는 말에 차마 대답을 못하고 물방울 같은 맑은 동자만을 깜빡거리고 서 있던 나의 제제,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뽀르뚜까, 아니 아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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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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