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의 눈물, 진단평가로 씻어질까

정진곤 교수의 '바보 학생의 눈물'을 읽고

등록 2002.10.10 14:33수정 2002.10.1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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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인터넷으로 조간 신문을 뒤적이다가 모 일간지에 실린 정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쁜 아침 시간인데도 두 번을 연거퍼 읽은 것은 교수님의 글에 녹아있는 '바보' 학생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따스한 시선과 고민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관한 토론이나 담론은 모름지기 '한 아이'의 삶에서 출발해야한다는 생각을 늘 해온 터라, 중학교 2학년인 재현이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글을 여신 그 방식에 마음이 이끌린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첫 대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중학교 2학년인 재현이는 IQ가 100이 넘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이다. 운동도 잘 하고, 다른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논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체육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다. 글자를 읽을 줄은 아는데 띄엄띄엄 읽을 뿐,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두자릿수 곱셈과 나눗셈을 잘하지 못하며, 분수 문제를 풀지 못한다. 재현이는 분명히 바보가 아닌데, 학교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다.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아이가 글을 못 읽고 수 개념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엄연함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무거운 굴레로부터 재현이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인성교육도 중요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습 결손 상태가 누적되지 않도록 제때에 진단평가를 하여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주는 것이 정부와 학교가 해야할 기본적인 책무라는 것이 교수님 글의 요지였습니다. 저를 한순간 멍하게 만들었던 대목입니다.

"학교에서 인성교육도 중요하다. 그러나 재현이 같이 제대도 읽고, 쓸 줄을 몰라서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학생의 인성과 인격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일이다. 올바른 교과교육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며 살아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야말로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인성교육이다."

누가 들어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 글에서 저도 마찬가지로 강한 공감을 느꼈던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부 주도의 진단평가가 교수님의 바람대로 부진아동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출발점이 되어줌으로써 '바보' 학생의 눈물을 씻어주는 일이 과연 생길 것인가? 하는 물음이 마음 한 편에서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주 복잡한 마음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지난 10월 3일, 저는 초등학교 3학년 전집평가를 반대하고 초등교육정상화를 요구하기 위해 전교조 선생님들과 함께 서울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아내와 약속한 가을 여행을 포기하고 모임에 다녀온 것은 어쩌면 교수님처럼 '바보' 학생의 눈물을 씻어주기 위한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교수님과 저는 같은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행동을 선택한 셈이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학교 현장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교수님은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위해 봉사하고 계시고, 저는 고등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초등교육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는 제가 좀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아시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진단평가는 매년 학년초마다 각급 학교 단위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부진아동에 대한 보충 교육 또한 상급 관청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학교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보' 학생의 눈물을 씻어주고자 하는 노력은 교육부가 요란을 떨면서 소리 높여 외치기 전에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학교 교실에서 소리 없이 내실 있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학년초에 실시하는 진단평가가 아니더라도 교사는 수업을 통해서 학생을 관찰하고 부족한 것을 섬세하게 감지하여 채워주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사의 첫째 되는 사명이요, 또한 전문적 영역이기도 합니다. 정부 주도의 진단평가는 이러한 교사의 정상적이고 전문적인 평가자로서의 역할과 기능들을 축소하거나 해칠 위험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교육부는 엄청난 예산을 낭비해가면서까지 학교간 혹은 지역간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교육의 근간을 위협할 것이 뻔한 전국단위 전집평가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미 서점가에서는 진단평가를 위한 예상문제집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학원가에서도 전집평가에 대비한 특별 과외가 성행하는 등, 벌써부터 그 과열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교육학을 공부할 때 배웠던 '실험관 속의 진실'이란 용어를 떠올렸습니다. 실험관 속의 진실이 생체 속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듯이 교수님의 너무도 타당하신 주장이 학교 현장의 생리 속에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초등교육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삶을 위한 공부가 얼마만큼은 가능했기에 그 건강성과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중학교 입시제도의 변화가 가져온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만약 정부 주도의 전집평가가 강행된다면 학교간 경쟁이 치열해져 학교는 곧 교육 본연의 길을 버리고 아이들은 점수 따는 기계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아이'에 대한 학교나 교사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은 어떤 외부적인 압력이 사라지거나 약해질수록 강하게 작용하는 법입니다. 학급 전체의 성적을 올려야하는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사는 재현이를 지극한 사랑만으로는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단평가로 인해서 학교 단위의 지필고사가 강화되는 등,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다 보면 동무들마저 재현이를 '귀엽고 아름다운 바보'가 아닌, 점수나 깎아먹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천덕꾸러기로 여길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상적인 아이가 '바보' 취급받는 것은 진단평가와 같은 시험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는 열악한 학교 환경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당 3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수업시수와 교사인지 사무원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과다한 잡무에 시달려 정작 수업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이들을 만나야 하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바보' 학생의 눈물이 씻겨질 날은 요원해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글을 마칠까 합니다. 교육부가 실시하고자 하는 초등학교 전집평가에 대하여 포괄적이고 충분한 의견을 개진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데, 그리고 한 오라기의 행동적 실천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에서 교육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납니다. 다만, 저는 '한 아이'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따뜻한 시선에 감동하여 '바보' 학생의 눈물에 관한 제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교수님께서 제 글을 읽어보시고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지 몹시 의아해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험관이 아닌 현실 속에서의 진실은 이렇듯이 아프고 어둡습니다. 저는 다만, 그 아픔과 어둠을 직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보' 재현이의 눈물을 씻어줄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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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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