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쌀 100일 걷기, "서울이 보인다"

13일, '여의도 만민공동회'를 향해 가는 발걸음들

등록 2002.10.11 01:35수정 2002.10.1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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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에 갔다가 오늘 돌아왔다. 3일만이다. 다리뿐 아니라 온 몸이 쑤신다. 특히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는 왼쪽 엉치뼈가 어긋났는지 걸음이 절룩댄다.


이번이 네번째다. 걷기팀이 진주에 머물 때와 전주에서 무주를 지날 때, 그리고 충북 보은읍 행사 때 합류를 했다가 이번에는 경기도 걷기일정에 참여한 것이다. 좋은 계절, 가을인데도 유독 이번 걷기가 힘들었던 것은 수많은 차량에서 뿜어나오는 매연가스를 뒤집어 쓴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듯싶다.

남양주시 농업인기술회관 운동장에서 밥을 먹고 있다. 전혀 기름지진 않지만 꿀맛나는 밥이다.
남양주시 농업인기술회관 운동장에서 밥을 먹고 있다. 전혀 기름지진 않지만 꿀맛나는 밥이다.전희식
남양주시 진건읍에서 사능을 거쳐 미금으로 넘어가는 길은 훤하게 뚫린 4차선 차도만 있고 인도가 없는 길이었다. 우리쌀을 지키자는 인간들은 길가 배수로에 빠질라, 자동차 피하랴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했다.

자동차들만 제 세상 만난 듯 기가 펼펄 살아 내 달렸다. 내가 과연 만물의 영장일까 의구심이 든 때가 바로 이곳을 지날 때였다.

경기도는 모든 지역이 이미 도시다. 고양, 장흥, 일영, 미금, 하남. 솔직히 징그러웠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시멘트 건물들과 인공의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발그레한 가을이 내려앉을 곳이 없어 보였다.

쌀은 그냥 상품이 아니라 생명 / 전희식 기자

아... 서울이구나.


내가 걸은 3일 동안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서울 표지판이었다. 서울방향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 아래로 서울 지명을 적어 넣은 시외버스들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서울로 가는구나. 7월 1일 전남 진도를 떠난 지 오늘로 102일째... 10월 13일이면 여의도 광장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우리쌀 걷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발걸음들은 그냥 담담했다. 9일은 아침 일찍 어느 신학대학교 교수부부가 우리의 출발지에 오셨다. 운동화와 간편복을 차려 입고 똑 같은 머플러도 매고 있었다. 하루를 온전히 걷기위해 단단히 준비했음이 엿보였다.

중간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끝이 없었다. 경남 함양에서 내년에 개교하는 녹색대학 관계자분들이 세 분 합류하셨다. 모두들 인사 나눔도 능숙했다. 이제껏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지금은 한 길을 가고 있는 한 식구이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노조 간부들과 한살림 회원들이 인사소개를 하고 있다. 농협노조에서는 하루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한살림에서는 참가 성금과 함께 배를 한박스 가져왔다.
농협중앙회노조 간부들과 한살림 회원들이 인사소개를 하고 있다. 농협노조에서는 하루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한살림에서는 참가 성금과 함께 배를 한박스 가져왔다.전희식
전국농협노동조합 경인본부 산하 구리남양주지부 조합원 십여명이 합류했다. 경기도 전 구간에 방송 선도차량 한 대와 실무자를 제공하고 있는 농협노조는 이날의 숙식까지 다 제공하신다고 한다.

오후에는 유기농산물 소비조합인 '한살림' 식구들이 십 여분 오셔서 같이 걷기 시작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의 성유보 선생님 얼굴이 보인 것도 오후부터였다. 다음날에는 서울강남의 어느 교회 청년회 회원들이 오셨다. 농촌을 생각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이제 겨우 나흘 남은 걷기 일정이 갑자기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길과 풍경과 쌀 이데올로기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100일 동안 걷고 있는 14살 소녀

곁에 한네가 보였다. 엄마랑 함께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은 우리딸 새날이와 동갑이다. 작년 실상사 작은학교 예비모임때 그 부모들도 함께 만났었는데 지난 7월에 진주에서 다시 만났다. 걷기 첫날부터 전 코스를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를 포기하고 홈스쿨링을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었다.

한네 엄마에게 새삼스럽지만 오마이뉴스 기자라고 밝혔다. 과장스런 내 말투에 한네 엄마가 깔깔 웃었다. 새날이 아빠 농사짓다 언제 기자가 되었냐고 되묻는다. 인사치레로 현직 교사인 한네 아빠 안부를 물었다.

석달 넘게 먼길을 잘도 걸어온 한네. 엄마가 오니 힘이 펄펄 솟는가 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 노루처럼 걷기대열 앞뒤로 뛰어 다니느라 한마디 제대로 말 걸 틈도 없었다.
석달 넘게 먼길을 잘도 걸어온 한네. 엄마가 오니 힘이 펄펄 솟는가 보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 노루처럼 걷기대열 앞뒤로 뛰어 다니느라 한마디 제대로 말 걸 틈도 없었다.전희식
"애기 아빠요? 초등학교 5년생인 한울이하고 두 남자가 내가 떠나온 지 보름여 동안 너무도 잘 살고 있대요. 동네 이집 저집에서 김치다 찌개다 생선이다. 제가 있을 때보다 더 잘 먹는대요. 하하..."

"한네는 첨부터 걷는 거고 엄마는 얼마나 걷는 중인가요?"
"저는 보성에서 며칠. 광주에서 며칠. 그리고는 대전에서는 지금까지 줄곧 걷고 있어요. 아마 모두 합하면 이십여 일 될 걸요. 이제 걷기가 끝나가고 해서 우리 한네 보살필 겸 왔어요.

"농사나 걷기나 어떻게 할만 해요?"
"올해 첨으로 밭벼 산두를 심었는데 논벼보다 못해요. 시골로 간지 몇 년되다보니 점점 시장 안 가게 되고, 가전제품 하나씩 버리고, 옷도 입고 싶은 거는 작년부터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안 만들어도 요즘 옷 없어 벗고 지내지는 않잖아요?"

아껴 쓰고, 함께 쓰고, 꼭 필요하지 않으면 없애고...

"그래도 돈 들어가는 데가 많을텐데 주로 한네 아빠가 다 책임지는 셈이겠네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어요. 옷 안 사고 책 안 사고 가전제품 거의 안 쓰고 생활 자체가 달라졌죠. 책요? 책이야 많이 읽지요. 도서관에서요. 읍내 도서관에 가면 비디오 있지 책 있지 인터넷 있지. 옛날에는 책 무지하게 샀는데 그게 다 짐이더라구요. 요즘은 책 안 사요. 옛날만큼 옷 자주 안 빠니까 손 빨래 해도 괜찮아요. 제 손으로 의식주 좀 해결하게 되면 병도 없고 공공시설 이용하면 돈 안들죠. 뭐."

"걷기에 참여할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농업을 지키자는 말하고 생명운동이라는 말을 듣고 버럭 관심이 생기더군요."

"한네는 잘 걷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변화무쌍한 것 같아요. 새로운 것들은 너무도 많이 접한 것 같고 특히 전국을 돌았잖아요. 마구 파헤쳐진 산들. 뿌리채 뽑혀 누운 나무. 폭우와 태풍. 자연의 엄청남 위력 등을 다 몸 적시며 겪었던 거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들이 너무도 많았대요."

"한네가 생활의 주체성이나 자율은 잘 배울 거라 여겨지는데 지식공부는 어떻게 하세요?"
"별로 안 해요. 그런데 점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더라구요. 영어도 좀 알아야 될 것같고 그러나봐요. 필요가 자연스레 생겨날 때 집중해서 하게 할 생각입니다."

싱걸벙걸 하면서 집에 남은 '두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매일매일 편지를 쓴다고 한다.
싱걸벙걸 하면서 집에 남은 '두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 매일매일 편지를 쓴다고 한다.전희식
"집에 남은 두 남자가 두 여자 없이도 계속해서 더 잘 살게 될까 겁나지 않아요?"
"겁 안 나는데요? 이것 보세요. 어제는 우체통을 못 봐서 못 부쳤어요. 하루에요 꼬박꼬박 편지 두 통을 써요. 어떨 때는 두 남자 각각해서 네 통 이구요. 하하..."

향기나는 길 위의 사람들...

나눈 얘기들을 괴발개발 수첩에 다 기록을 하였는데 지금 보니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글씨가 지렁이처럼 늘려 있다. 걸으면서 쓰는 글씨니 오죽 했으랴만 서울 사는 내 친구한테 전화해서 왠만하면 와서 같이 걸어보자고 전화를 주고받느라 더 그랬던 것 같다.

행진대열을 안내하고 있던 김치환씨가 13일 여의도 만민공동회 때 화백회의는 황선진 선생이 맡기로 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12일 과천시민회관에서 개최하는 우리쌀 걷기 음악회에 안치환이가 나온다는 게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 사이 걷기 대열에는 또 새로운 얼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강한이를 찾았다. 아까 '내멋대로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반색을 하면서 내 손을 잡아 흔드는 사람이 있어 보니 저 멀리 전북 부안에서 온 고영조 의원이었다.

참 지금은 의원이 아니다. 군의원으로 모범적으로 활동했지만 지난번 선거에서 공공연히 새만금 개발 반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쓴잔을 마신 소신있는 정치인이다.

그 사람이 고등학교 2학년인 장남을 학교의 동의를 얻어서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13일까지 걷기로 했다고 자기는 바빠 가야하니 잘 부탁한다고 했던 생각이 나서였다.

지 아버지보다도 키가 더 큰 강한이는 터벅터벅 잘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잘 걸어가거라. 돌부리에 걸리더라도 넘어지지 말고 잘 걸어가거라. 벌써 네 길 네가 가는구나.
첨부파일
nongju_61184_30[1].AVI

덧붙이는 글 | 1840Km 를 걸은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팀은 10월 13일 여의도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자세한 내용과 시민들의 참가방법은 홈페이지 www.refarm.or.kr 에 있다.

덧붙이는 글 1840Km 를 걸은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팀은 10월 13일 여의도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자세한 내용과 시민들의 참가방법은 홈페이지 www.refarm.or.kr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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