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어가는 가을, 스산해지는 마음

집안에 곡식이야 가득 차지만 돈 될 것은 없고

등록 2002.10.22 13:09수정 2002.10.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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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새들이와 함께 밤을 주우러 산에 갔다. 새들이에게는 배낭을 지우고 나는 기다란 막대기를 어깨에 멨다.


밤 줍는 것보다도 산돼지 잡겠다고 나선 아들이 믿음직스럽다. 자기만 믿고 뒤따라오라고 한다.
밤 줍는 것보다도 산돼지 잡겠다고 나선 아들이 믿음직스럽다. 자기만 믿고 뒤따라오라고 한다.전희식
어제는 새벽에 뒷산으로 산밤을 따러 갔다가 멧돼지를 만나 혼이 났다. 아침 이슬이 다 깨지 않은 산길을 오르는 시간 내내 작년에 함께 밤을 따러 갔던 쌍둥이네 할아버지가 먼저 다녀가셨는지 그 생각만 골똘히 하면서 사람 발자국 흔적을 살피느라 정신을 팔고 있을 때였다. 아래 계곡에서 '쒸익'하는 소리가 처음 났을 때 직감적으로 산돼지가 내려왔다는 걸 알았다.

멧돼지와 나는 서로에게 놀란다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 밤나무 위로 도망을 쳤다. TV에서 산짐승이 나무위에까지 기어올라오던 화면이 생각나 좀더 높이 올라갔다. 팔뚝과 목덜미가 나뭇가지에 긁혀 피가 배어나왔고 끼고 있던 장갑도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벗겨지고 없었다.

나만 놀란 게 아니고 멧돼지도 놀랐는지 계곡 비탈에서 나뒹굴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계곡 덤불과 수풀 사이로 저돌적인 몸매를 언뜻언뜻 내보이며 풀쩍풀쩍 날뛰며 산언덕을 넘어가는 멧돼지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겨우 나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저 멧돼지가 이리도 놀란 내 모습을 봤으면 싶었다. 그러면 나처럼 좀 진정이 될 것 같아서였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혼자 밤을 줍는 게 더럭 무서워져서 산을 내려왔다. 그래서 오늘은 오후에 아들을 앞세워 다시 산에 올라간 것이다.


올 봄 생협에 갔다가 아는 농민회 회원이 몇 포기 준 것을 심었는데 여름내내 그늘을 만들어주더니 이렇게 주렁주렁 열렸다.
올 봄 생협에 갔다가 아는 농민회 회원이 몇 포기 준 것을 심었는데 여름내내 그늘을 만들어주더니 이렇게 주렁주렁 열렸다.전희식
밤을 근 한 말가량 주웠다. 한 나무에서만 그랬다. 좀더 올라가면 밤나무가 세 그루나 더 있지만 그냥 내려왔다. 옛날에는 다 임자가 있었다는데 기력이 다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팽개쳐둔 지가 십 수 년이 되다보니 관리되지 않는 감나무 밤나무가 산짐승 날짐승들의 좋은 식량원이 되기도 한다.

어딘가 신문에서, '다람쥐랑 청솔모랑 들쥐들이 뭘 먹고 살라고 도토리니 산밤을 싸그리 다 주워오냐'고 나무라는 글을 본 것이 생각났다. 뭐가 옳은지 좀 헷갈릴 때는 무조건 안 하는 쪽으로 정한 지 오래다. 밤도 그만 주워올 생각이다.


어김없이 가을이다

새로 따온 끝물 고추가 마당에 널리고 다 마른 고추는 저장용 대형 비닐봉지에 담긴다. 마당에는 각종 수확물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가을햇살을 다투느라 작은 소란이 일기도 한다.

우물 위로 올렸던 수세미가 주렁주렁 열렸다. 우리 아들 팔보다도 더 크고 길다. 이 수세미로 실내화를 만들고 싶다는 친구는 오늘도 안부전화가 왔다. 수세미 잘 있냐는 전화다. 옥수수도 다 말라서 갈무리를 했다.

밭두둑으로 졸졸 심은 옥수수대에 까치가 떼거지로 몰려와 이제야 여문 잔챙이 옥수수들을 파먹고 있다. 호박도 썰어 말리고 처음 수확한 제피 껍질과 열매는 분리해서 담았다. 들깨도 쪄내야하고 고구마도 캐야한다. 땅콩도 캐고 올해 처음 심은 돼지감자도 캘 때가 되었다.

작년 가을에 제일 맛있고 실한 옥수수만 골라 씨를 받아 심었는데 맛이 차지고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작년 가을에 제일 맛있고 실한 옥수수만 골라 씨를 받아 심었는데 맛이 차지고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전희식
내 마당으로 들어와 널린 각종 수확물들은 우리 밭에서 난 것들도 있지만 길가에 심은 호박, 산에서 따온 제피, 옆집에서 갖다 준 홍시 등. 내 것 아닌 게 더 많다. 이래서 시골의 가을은 더욱 풍성하다.

태풍에 떨어졌던 생감들을 모아 믹서기에 갈아서 낸 감즙으로 감물염색을 했었다. 근 한 달째 햇볕을 쬐고 있는데 하루하루 색깔이 깊어지고 있다.

하루 햇살이 아쉬운 나날들

덜 익은 호박들은 서리가 오기 전에 따다가 올해는 거름자리에 버리지 않고 호박즙을 만들거나 호박효소를 담글 생각이다. 호박 즙을 낼 가마솥을 곧 마당에 걸어야 한다. 담벼락 구멍마다 들쥐들도 가을걷이하느라 분주하다. 다람쥐가 동네까지 내려오기도 하는 때가 이때다.

여름철 힘에 겨운 노동이 길고 모질어서일까? 다른 계절보다도 유독 가을은 벼락처럼 온다는 생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잡초들이 맥을 탁 놓고 꼬시라져 버린다거나 애호박 하나를 찾으려면 호박넝쿨을 이 잡듯이 뒤져도 나중에 보면 놓친 게 보이곤 했는데 푸른 호박잎보다 누런 호박이 더 잘 눈에 띄는 날이면 영락없이 가을인 것이다.

햇볕을 받을수록 천이 짙어져 간다. 옅은 갈색이던 것이 지금은 암갈색으로 변해 있다. 한 달 가량을 볕만 먹고 그렇게 되었다.
햇볕을 받을수록 천이 짙어져 간다. 옅은 갈색이던 것이 지금은 암갈색으로 변해 있다. 한 달 가량을 볕만 먹고 그렇게 되었다.전희식
채비 없이 다가오는 이별은 지난날도 용서하는 법인가. 여물어 가는 열매들은 하루 햇살이 아쉽기에 풀맬 때 내 숨통을 막았던 지난 무더위가 더 이상 원망스럽게 기억되지 않는 이유다.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가을이야말로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이다. 어느 농부나 내년 종자를 가을에 골라 챙긴다. 씻 나락부터 베어내고 타작을 한다거나 모종 부을 고추는 따로 보관하였다가 파종직전에 고추 중간을 가위로 잘라 씨를 낸다. 오이나 가지는 길게 썰어 잘 말린 다음 비벼서 씨를 뺀다. 다 가을에 해두어야 하는 작업이다.

주워 온 밤을 물에 담가서 뜨는 것은 삶고 가라앉는 것만 골라서 항아리에 흙을 켜켜이 넣으면서 밤을 묻었다. 물에 뜨는 것은 벌레 먹었거나 설익은 것들이다. 홍시나 깨진 감들은 감식초감이다. 역시 항아리에 따로 담는다. 겨울부터 내년 봄까지 먹을 싱싱한 밥상을 보장하는 것도 역시 이 가을이다.

무더웠던 여름이야 일하는 재미로라도 살았지만 이제 긴긴 겨울을 앞두고 시름만 깊어간다. 농협에서는 이자에 원금에 닥달이 시작될 것이고 집안에 가득한 곡식들은 서푼어치도 안 나갈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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