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 불에 감자굽는 냄새를 맡으며

하루하루 새날에 대한 신고식을 한다

등록 2002.10.26 11:36수정 2002.10.3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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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아궁이 가득 불을 지핀다. 구들장을 두껍게 했기때문에 새벽에 불을 넣어야 잘때 따뜻하다. 한번 불을 때면 꼬박 3일을 간다.
새벽에 아궁이 가득 불을 지핀다. 구들장을 두껍게 했기때문에 새벽에 불을 넣어야 잘때 따뜻하다. 한번 불을 때면 꼬박 3일을 간다.전희식
이제야 들판의 샛노란 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래쪽부터 물들고 있는 은행나무의 단풍도 보입니다. 날이 새는 것입니다. 앞산은 아직 형체만 있고 골짜기도 산등성이도, 나무들도 바위도 식별이 되지 않는 새벽입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천지가 젖어 있습니다. 젖은 모습은 사납지가 않습니다. 가을이라 더 그렇지만 오늘 하루는 유난히 넉넉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벌겋게 달아 오른 아궁이 앞에서 일어납니다. 장작을 거두어 넣고 불잉걸을 따로 끌어냈습니다. 오늘 새들이가 일어나면 아침 식사로 감자를 구워주려고 합니다. 지금쯤 일어날 때가 되었지만 어제 학교 빠지고 나랑 순창 쪽 회문산에 등산 갔다 와서 피곤한지 일어날 기척도 없습니다.

회문산. 산 중턱 빨치산사령부 옛터에 들어가서 둘러볼 때는 어린 것이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빴다고 합니다. 왜 그랬는지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빨치산 사령부란 팻말을 가리키면서 원래 이름은 남부군 제2사령부라고 내가 고쳐주었습니다. 왜 원래 이름을 안 부르냐고 새들이가 되물었습니다.

아직 베지 못한 벼가 논에 그대로 있다. 감은 서리가 오기전에 따야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직 베지 못한 벼가 논에 그대로 있다. 감은 서리가 오기전에 따야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전희식
초등학교 5년생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까 망설이다가 아시안게임 예를 들어 주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정식 이름대신 북한이라고 불러서 북한 선수들이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새들이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름을 불러야지 이름 놔두고 남이 마음대로 지어서 부르면 기분 나쁘잖아요." 혼자 투덜대는 새들이 모습에 북한도 우리를 대한민국이라고 안 부르고 남조선이라고 부른다고 말하며 저는 혼자 씁쓸히 웃었습니다.


감자를 꺼내왔습니다. 완전 생태농으로 지은 우리 감자 맛은 세상이 다 알아줍니다. 유기농 생협 감자만 먹는 시내 어느 분도 우리 감자 맛을 보고는 매큼한 옛날 감자향이 나더라면서 생협 감자보다도 맛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은 농산물을 자그마한 쇼핑몰을 하나 만들어서 주변에 팔아볼까 궁리하게 되는 것도 주변 분들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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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건 고구마건 구워 먹는 게 제일 맛있다.

약간 사윈 불잉걸에 감자를 묻습니다. 불이 쌀 때는 감자가 익기도 전에 타버리니까 불잉걸이 수긋해졌을 때 재랑 같이 넣어야 합니다. 감자뿐 아닙니다. 밤이나 고구마도 구워 먹는 게 훨씬 맛있습니다. 굽는것도 이렇게 아궁이 잉걸에다 구워야 제 맛입니다.


굴뚝에 연기가 잘 솟구친다. 구들 놓을 때 개자리를 깊게 파 주어서 그렇다. 구들학회에 가서 머리 싸매고 배웠었다.
굴뚝에 연기가 잘 솟구친다. 구들 놓을 때 개자리를 깊게 파 주어서 그렇다. 구들학회에 가서 머리 싸매고 배웠었다.전희식
날씨가 싸늘해진 요즘 자주 방에 불을 넣습니다. 아까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수수한 얼굴로 아궁이 앞에 앉다가 문득 내가 신고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에 대한 신고식.

병영 초소 앞에서 막대기처럼 고함 내지르는 그런 신고식이 아닙니다.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신고식입니다. 대지와 공기와 하늘과 내가 서로 숨을 쉬며 소통을 시작하는 알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서도 그걸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마치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삽니다. 착각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 둘레를 한바퀴 돌고 아궁이에 불 지피는 것이 요즘 내 새날에 대한 신고식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신고식을 지극한 마음으로 하다보면 하루가 참 알찹니다. 가부좌하고 맞는 새벽명상하고는 또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무고한 살생을 막을 수 있었던 것도 내 신고식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긁어 놓은 갈비를 갖다가 불살개에 불을 지폈을 때입니다. 파아란 연기 한줄기가 파르르 떨면서 가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흩어지는 파란 연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데 아궁이 속에서 푸다닥 하면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집 없는 고양이들을 다시 왔으면 좋으련만...

내 무릎을 타고 넘어 쏜살같이 내빼는 도둑고양이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기겁을 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처음에는 고양인지 뭔지도 몰랐습니다. 워낙 어둑어둑해서기도 하지만 생각치도 않은 아궁이 속에서 뭐가 튀어 나오니 기절초풍할 정도였습니다.

감자를 굽는다. 전체적으로 잘 익으면서도 겉이 타지 않게 할려면 자주 보살펴 주어야 한다. 밤을 구울때는 껍질을 따 주지 않으면 눈깔 뺀다고 한다.
감자를 굽는다. 전체적으로 잘 익으면서도 겉이 타지 않게 할려면 자주 보살펴 주어야 한다. 밤을 구울때는 껍질을 따 주지 않으면 눈깔 뺀다고 한다.전희식
겨우 정신을 수습하면서도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은 내가 만약 장작을 아궁이 가득 모아놔 버렸으면 그 고양이는 불에 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문득 이 도둑고양이는 우리 텃밭 구석에 자주 출몰하던 새끼고양이라는 생각에 새끼들이 세 마리가 몰려다니던 기억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궁이에서 멀찍이 떨어져나와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거푸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불살개 불을 밟아 꺼뜨리면서 뛰쳐나왔습니다. 벌써 어미고양이에게서 분가를 했나 봅니다. 새벽공기가 너무 차니까 아궁이 속에 들어 간 게 분명합니다. 아궁이에 문을 해 달아야겠습니다.

아궁이 앞에는 라면박스나 헌 옷가지를 놔둬야겠다 싶은데 오늘 불에 타 죽을 뻔했던 고양이들이 다시 나타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마당 구석에 도둑고양이들 먹으라고 생선 가시나 음식물 남을 걸 접시에 놔두곤 했는데 이들이 아궁이에서 잘 줄을 몰랐습니다.

도둑고양이라고 부르기보다 집 없는 고양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집 없는 고양이라는 말도 맞지 않겠습니다. 집고양이가 도리어 갇혀 사는 고양이라고 불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네요. 어쨌든 이 고양이들이 다시 찾아와 아궁이 앞에서 따뜻하게 잤으면 합니다.

감자를 꺼내기도 전에 새들이가 일어나 아궁이로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식사는 부엌에서 쭈그리고 앉아 부잣집 하인네처럼 그렇게 했습니다. 서로 주둥이를 손가락질해가며 놀려 먹었더니 배가 더 부릅니다.

덧붙이는 글 | 갈비 - 마른 소나무 잎.
불살개 - 불 쏘시개

덧붙이는 글 갈비 - 마른 소나무 잎.
불살개 - 불 쏘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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