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

어머니의 '어버버'하는 수화와 함께 신부님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물결치는 소리가 쏴아아 밀려 들어왔다

등록 2002.10.25 02:59수정 2002.10.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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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강당에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찼다. '힙합 경연대회'가 있는 날이라 학생들과 격려차 들른 어른들도 꽤나 많이 모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예쁜 무대까지 꾸며졌다. 그 동안 소름 돋도록 조용했던 정적은 흥청 깨지고 흥에 찬 사람들로 강당 안의 좌석은 가득 메워졌다.

육현이는 대기실 밖으로 머리를 빠끔 내밀고 객석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어머니가 찾아올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지 않던 일이 이내 현실로 이어졌다. 객석 맨 뒷쪽 후미진 곳에 신부님과 나란히 앉아 계신 어머니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육현이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 인해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어버버 엄마'라는 놀림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머니의 의사소통 방법이, 수화를 하거나 조용한 표정으로 의사 전달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남이 있건 말건 '어버버버'하는 큰 목소리와 손짓, 몸짓이 곁들여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기에 딱 좋았다. 그래서인지 육현이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 다른 친구들 어머니들과 비교도 많이 하였고, 비교하면 할수록 육현이의 자존심은 상처만 입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어머니께 신신당부를 하였다. 경연대회가 열리는 강당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만일에 입상하여 상을 받게 되더라도 꽃다발 전해줄 친구들이 많다고 이마에 땀나도록 설명을 해주었다. 어머니는 못내 서운한 듯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육현이의 단호한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정리되고 곧장 대회가 시작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연습을 했는지 몰라도 또래 아이들의 춤 실력은 대단하였다. 그렇지만 육현이 팀은 앞서 끝난 팀들의 춤을 찬찬히 지켜본 결과 그 언제보다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 정도면 일등은 따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들떠서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흥분하고 있는데 육현이만은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거렸다. 육현이 또한 다른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일등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혹시나 어머니가 무대에 꽃다발이라도 전한답시고 올라오지나 않을까 생각하니 남세스러움에 오금이 저려왔다.

같은 팀원들과 객석에서 응원한 여자 친구들도 어머니가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더욱 전전긍긍하였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과민반응 때문에 친구들조차 육현이 앞에서는 자기 어머니 자랑은 하지 않고 있는 터였다.

차라리 실수라도 저질러 입상권 밖으로 밀려나기를 내심 바랬지만 그 또한 모진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내내 비지땀을 됫박으로 흘려가며 연습하였던 친구들의 절망에 찬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드디어 육현이 팀 차례가 왔다. 사회자가 육현이 팀을 호명하는 소리에 무대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때 객석 저 멀리서 벌떡 일어섰다 앉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커다랗게 잡혔다. 순간 육현이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것도 잠시 금방 무대를 쿵쾅쾅 울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춤을 추고 있을 때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보다 가난하다는 열등감도 없었고, '어버버 어머니'라는 창피스러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랬다. 육현이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이런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음악이 멈추고 난 뒤 세찬 물길처럼 쏟아지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함성 소리에 묻혔지만 폴짝폴짝 뛰는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여름 내내 열정을 쏟은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는 생각이 앞서고 잠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열등감은 사라지는 듯하였다.

마지막 팀의 춤이 끝나고 난 뒤 인근 대학에서 온 힙합 그룹의 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기다리던 시상식이 시작됐다. 한 팀 한 팀이 수상을 하고 마지막 최고상을 발표할 때 장내는 또 한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객석 한 쪽에서 육현이 팀을 연호하는 소리가 작게 시작하더니 금방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 오늘의 영광은 어느 팀으로 돌아갈까요?"
사회자가 한참을 뜸들이듯 발표를 늦추다가 관중이 숨을 죽인 틈을 타서 벼락같이 일등을 발표했다. "영예의 대상은... 블루 아이콘스!"

앞이 캄캄하였다. 일등일 거라는 짐작은 하였지만 막상 팀 이름이 호명되자 심장이 멎을 듯 기뻤다. 대표인 육현이가 트로피와 상장을 받았다. 박수와 함께 객석에서부터 꽃다발 세례가 퍼부어졌다. 그때서야 문득 육현이는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단상에 올라오지 않아 휴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참 수상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귀청을 쨍하고 뜯어내는 듯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조용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특별한 손님 한 분 모시겠습니다." 폭죽에 꽃다발 세례를 퍼붓던 아이들이 잠시 호흡을 고르듯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읍내 성당의 신부님과, 영예의 대상을 차지한 블루 아이콘스팀의 리더 김육현군의 어머니를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육현이는 어머니라는 단 한 마디의 말 때문에 그토록 펄펄 날던 기가 쏙 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휘청거리며 친구들 뒤춤으로 숨어 들어갔다. 숨이 턱턱 막혀오고 창피스러움으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여러분 신부님께서 중요한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마이크를 받아든 신부님은 따뜻하고 환한 미소로 육현이와 객석을 번갈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육현군의 어머니는 말을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랑스러운 아들을 위해 축하의 말을 전해주겠다고 이 자리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수화를 말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니의 '어버버'하는 수화와 함께 신부님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물결치는 소리가 쏴아아 밀려 들어왔다. 친구들은 뒤에 숨어 있는 육현이를 어머니 앞으로 끌어당겼다. 신부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고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육현이 눈에도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 앞에는 '창피스러운'이나 '부끄러운'이란 말들이 절대 올 수 없다는 것을 신부님이 조용히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육현이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쥐어주며 신부님은 객석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둔 육현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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