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서 벼 타작하는 즐거움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22>지게와 타작

등록 2002.11.06 16:38수정 2002.11.06 21:1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지게

지게 ⓒ 민속박물관

"이런 이런! 나락에 싹 튼 거 좀 봐라"
"허 참~ 싹 튼 이런 거는 풍로에 돌리면 전부 다 쭉쨍이로 다 날아간다 아이가. 가마이 보자. 그라고 나모 마지기당 한가마이 정도는 덜 나겄네. 내 참! 쎄(혀) 빠지게 지어놓은 일년 농사 완전히 베리뿟네(버렸네)"
"우짤끼요, 그래도 할 수 없지. 그래서 갈비(가을비)는 농사 망치는 비라 캤다 아이요"


가을에, 특히 벼를 베어놓았을 때 비가 오면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는 벼농사와 보리농사를 주로 지었다. 벼농사와 보리농사의 장점은 일단 가족들이 배를 곯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큰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 인근 마을에서는 특용작물을 심어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쌀과 보리 농사만을 고집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토질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특용작물은 기본 밑천이 있어야 했고, 그 작물에 따른 특별한 기술이 필요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실패에 따른 부담감이었을 것이다. 벼와 보리농사는 아무리 실패를 해도 그나마 가족들 먹고 살만한 정도의 곡식은 건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특용작물은 한번 실패하면 돈뿐만이 아니라 자칫하면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 또 인근 마을에서 벼와 보리농사를 버리고 특용작물에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벼와 보리농사를 포기하는 어르신이 단 한 분도 없었다. 사실 벼와 보리농사는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것에 비하면 몇 갑절의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 참외나 수박농사를 지을 줄 몰라서 안 짓는 줄 아나?"
"그으래. 쌀밭등에 듬정댁이 봐라. 쓰잘떼기 없이 잘 알다 못하는 물외(오이) 농사를 짓는다 카다가 폭삭 안 망했나"
"누가 뭐라캐도 우리한테는 쌀, 보리농사가 제일인기라. 아,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살아야지, 풀을 먹을라 캤으니 그기 어디 될 말이가"
"그래, 내 말이 바로 그말 아이가"

벼베기가 끝나고 나면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나 벤 벼를 마른 논바닥에 일주일 정도 그대로 두고 몇 번씩 뒤집어 가면서 따가운 가을햇살에 말렸다. 그런 뒤, 마을 어머니들은 10포기가 한 묶음으로 놓인 그 벼를 짚으로 묶어 볏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볏단을 논에 차곡차곡 쌓아 동산 같은 벼 낟가리를 군데군데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을 아버지들은 그 낟가리에 쌓인 볏단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날랐다. 타작을 하기 위해 논에 있는 볏단을 모두 집으로 옮기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게에 볏단을 일정한 높이로 쌓아올려 새끼줄로 꽁꽁 묶은 뒤 어깨로 져서 날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신작로 옆에 있는 논은 그나마 수월했다. 논에서 신작로까지만 나락을 지고 나가면 리어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할 일은 벼 낟가리에 있는 나락을 지게에 져서 리어카까지 운반을 하고, 리어카에 일정한 볏단이 실리면 집으로 운반을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볏단이 산더미처럼 실린 리어카를 모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신작로에서 집까지 이르는 길에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몇 군데 있었다.


"뭐하노? 더 세게 안 밀고"
"밀고 있다카이. 더 세게 댕겨보라카이"

오르막길은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다. 힘만 좀 더 들이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이 항상 문제였다. 내리막길은 리어카 운전수가 양다리를 여덟 팔자로 벌려 단단히 버티면서 조금씩 발을 떼야 했다. 뒤에 있는 우리들 또한 리어카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면서 리어카 운전수처럼 양다리를 여덟 팔자로 벌리고 발을 조금씩 떼야만 했다.

"자아~ 내려간다. 세게 댕기라이"
"발을 살살 떼고 천천히 움직이라카이. 우리는 얼라(아기) 젖 묵는 힘까지 다 내가꼬 댕길긴께네"
"자아~ 살~살~ 살~살~"
"어어어어~"
"쿵!"

한번은 큰형이 리어카를 운전하다가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다. 리어카를 몰던 큰형이 그만 다리가 휘청해지면서 리어카에 실린 볏단이 순식간에 뒤로 쏠렸다. 그와 동시에 그대로 내리막길 구석에 리어카와 함께 처박혀 버린 것이었다. 그대로 밀려 내려갔으면 리어카와 함께 통째로 시냇가에 빠졌거나 아니면 볏단과 내리막길 구석에 끼여 큰 일이 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리어카의 손잡이 때문에 큰형은 팔과 무릎 등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빨간 약(옥도정기)을 흘러내린 피처럼 바르고 나을 그 정도.

그랬다. 늘 동산과 복이네 집 사이에 난 그 내리막길이 문제였다. 특히 그 길은 60도 정도 내리막길인데다가 좁고 휘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우리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가 둑이 가로막고 있었고,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45도로 휘어져 있었다. 이 곳은 마을 어르신들도 리어카에 짐을 싣고는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리어카에 볏단을 가득 싣고 이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어야 만이 마을에서 모범 운전수로 인정받았고, 겨우내 골목 대장질을 할 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왜 볏단을 모두 집으로 옮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탈곡기를 논으로 가지고 가서 타작을 하면 그만일 것을. 하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는 요즈음처럼 그런 성능 좋은 기계가 없었다. 당시 탈곡기는 큰 원통에 아주 굵은 철사가 길쭉한 삼각형 모양으로 촘촘히 튀어나와 있었고, 앞쪽에 길게 달린 발판을 발로 힘껏 밟으면 그 큰 원통이 "기야동~ 기야동~"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또 타작을 수월케하기 위해서는 집마당 가득히 오른쪽으로 낟가리를 가지런히 쌓아두어야만 했다. 그러면 마을 어르신 몇몇이 집으로 그 탈곡기를 싣고 와서 벼 낟가리 왼쪽에 탈곡기를 설치했다. 하지만 그 탈곡기도 언제나 부르면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에 1-2대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작이 한꺼번에 몰리는 때는 그 탈곡기를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만 했다. 어떤 때는 탈곡 순서가 되지 않아 이웃 마을에 있는 탈곡기를 빌려와 탈곡을 한 적도 있었다.

타작이 시작되면 어른 여럿이서 그 발판을 열심히 밟아가면서 볏단을 들고 "기야동~" 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그 원통에 벼 알갱이가 달린 곳을 갖다대면서 양쪽으로 열심히 돌린다. 그리고 벼 알갱이가 모두 떨어지고 나면 짚단을 뒤로 '훽' 집어던진다. 그리고 또다시 연이어 그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발은 열심히 발판을 밟아야 하고, 두 손은 볏단을 들고 열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면 벼 알갱이들이 촤르르르르 촤르르르르 소리를 내면서 탈곡기 앞에 쌓이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거의 모든 것을 사람 손으로 다 처리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기야동~ 기야동~ 기야동~ 기야동~"
"니는 허새비가 뭐꼬? 빨리 볏단 가져오지 않고"
"기야동~ 기야동~ 기야동~ 기야동~"
"야~ 이 넘의 손아. 니는 뒤에 있는 짚단을 빨리 안 치우고 뭐하노"
"좀 잘 보고 던지이소. 눈탱이에 짚단을 맞아 아파 죽겄거마는"
"기야동~ 기야동~ 기야동~ 기야동~"

집에서 타작이 시작되면 집안은 온통 기야동 소리와 어르신들의 고함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으로 시끌벅적했다. 타작은 주로 어르신 3명이 탈곡기를 숨차게 밟으며 볏단을 훑는 것으로 시작된다. 볏단을 훑어내는 것도 대충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볏단을 제일 처음 짚어든 사람이 1차로 대충 훑고 나면 옆 사람에게 넘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 훑다가 또다시 옆 사람에게 넘긴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이 볏단을 모두 훑어낸 뒤 짚단을 뒤로 툭 던지면 끝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그 짚단에 나락알갱이가 달려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한 뒤에 짚더미 속으로 던져야 했다. 간혹 나락알갱이가 제법 많이 달린 것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다시 볏단 속에 집어넣어 새롭게 훑게 만드는 것도 우리들의 할 일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몸뻬 바지를 입은 어머니께서는 주로 탈곡기 앞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누렁이 소의 불룩한 배처럼 누렇게 쌓이는 벼 알갱이 속에 섞여 나오는 벼 지푸라기를 까꾸리(갈퀴)로 걷어내는 일과 쌓이는 벼 알갱이를 앞으로 끌어내는 일을 주로 하셨다.


기야동~ 기야동~ 소리를 내며 진종일 쉴새없이 돌아가던 그 탈곡기... 그 탈곡기를 우리를 '기야동 기계'라고 불렀다. 또 먼지는 얼마나 많았는지 타작을 하다가 참을 먹을 때, 코가 맥맥하여 코를 풀어보면 짚가루 같은 시꺼먼 것이 툭 튀어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늘 타작을 하는 날은 웬지 모르게 즐거웠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타작이 시작되면 우리들이 할 일은 주로 타작하기 좋게 탈곡기 옆에 볏단을 쌓아두는 일과 짚단 치우는 일이었다. 몹시 바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즐거웠다. 그리고 참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너거들 오늘 참말로 욕 많이 봤제?"
"아입미더. 어르신들께서 더 큰 욕 보셨다 아입미꺼"
"아나, 이거 묵어라. 그라고 퍼뜩 도랑에 가서 목욕하고 온나. 오늘 저녁은 참말로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주꺼마"
"예~"

그렇게 탈곡이 끝날 때쯤이면 어느덧 늦은 가을해가 마산 하늘을 붉게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마을 어르신들은 먼지가 뽀얗게 쌓인 눈썹을 치켜올리며 허연 막걸리 사발을 순식간에 비워내셨고, 우리들은 삶은 고구마의 붉은 껍질, 그러니까 노을 빛과는 다른 빨간 껍질을 벗겨내며 고구마 속살을 볼 터지게 먹었다.

간혹 너무 급히 먹다가 목에 걸리는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물을 조금 마시면 금방 쑤욱 내려갔지만 일부러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등을 두드려 주실 것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래. 지금도 들려온다. 그 '기야동~ 기야동~' 하는 배부른 소리가. 노을에 벌겋게 물든 마을 앞 도랑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어~ 추워 어~ 추워'하는 소리가. 그리고 몸에 물을 대기만 하면 온몸이 마치 가시에 찔린 듯 따끔따끔 거리던 그 느낌이...

앞마당에 황금 알처럼 수북히 쌓인 벼 알갱이를 바라보며 한술 가득 떠 넣던 그 하얀 고봉밥이, 금방 담근 벌건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 밥알 볼록한 숟가락 위에 척척 걸쳐 주시던 어머니의 그 굳은 살 수없이 박힌 손가락이, 내 그림자처럼 자꾸만 떠오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