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 오른쪽 하단의 민현에서 동쪽 압록강까지다
하지만 ‘장성’이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 바뀌고 그 이름을 얻은 것도 진시황이었다. 진시황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주름잡던 7웅(雄)을 차례차례 깨고, BC 221년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다. 7웅을 깨고 중원을 통일했다고 해서 북쪽마저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북쪽은 옌산(燕山), 타이싱산(太行山), 인산(陰山), 허란산(賀蘭山), 치롄산(祁連山) 등 황량한 고산이 둘러쳐 있다. 7웅의 일부는 지금의 장성보다 휠씬 북쪽인 이 산들까지 세력을 갖고 있었다. 더러는 성을 쌓아 방어벽으로의 역할을 했다. 아무리 막강했던 진(秦)이라 해도 유목민족으로 뛰어난 전투 능력을 가진 흉노(匈奴)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시황제는 과거의 성벽을 연결하는 한편 증축, 개축을 총해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출발해 황허(黃河) 서쪽,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반도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시황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억리장성이 있어도 후사를 단속하지 못하고, 민심을 잃는다면 허사라는 것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보여줬다.
진의 멸망이후 만리장성은 사실상 거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시황제에 버금가는 통치자 한무제(漢武帝 재위 BC 141~87)가 등극한다. 그는 54년에 이르는 재위기간도 재위기간이지만 동중서(董仲舒)등을 채용하여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동서로 영토를 넓혔다. 또 그는 그 힘을 활용해 흉노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한편 이번에는 깐수성 민현에서 멈추지 않고, 신장성(新疆省)에 이르는 2 만리장성을 구축했다. 이후에 정비됐던 어느 장성보다도 거대했다.
- 유목민족과 한족 권력 교차하며, 기능 축소되어가
한무제가 만리장성이 아닌 2만리장성을 쌓았어도 내부의 분열은 어쩔 수 없었다. 한나라는 후한을 거쳐서 ‘황건적’의 난등으로 급속한 위기를 맞는다. ‘삼국지연의’의 배경이 되는 위촉오 삼국이 번성한 시기다. 창지앙 중심지대에서 이 세나라가 싸우다가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사마중달이 세운 진(陳)을 멸망시키는 시기를 일컫는 남북조시대(221∼589)에 북쪽에는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 동위,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이 있었다. 인산산맥과 타이싱산 남쪽에 있는 이 국가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돌궐(突厥), 유연(柔然) 등 북방 유목민족이었고, 역시 강성한 이들 민족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남북조시대는 수(隋)의 통일(589년)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수 역시 돌궐이나 거란 등을 막기 위해 장성의 보수작업에 나섰다.
태종의 힘으로 한무제 못지 않은 국력의 번성을 맛본 당(唐 618~907) 역시 흉노족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송(宋 960~1277) 왕조에는 봉화대나 무기고 등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여진족이 건립한 금(金 1115∼1234)은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장성 보수를 나섰다. 하지만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까지 세력권을 넓힌 칭기즈칸에게 만리장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고에 의한 중원의 통일은 만리장성 남북간의 완전한 통일을 말했다. 원(元 1271∼1368)나에게 만리장성은 상호가 왕래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