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링으로 읽는 中문학 '순수와 참여'

<차이나소프프-문학5>
옌안 문예좌담회와 공산화를 기점으로 참여문학이 독주

등록 2002.12.04 01:54수정 2002.12.0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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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논쟁을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카프 문학’을 떠올릴 것이다.

카프(KAPF)는 1925년에 결성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의 약칭이다. 김기진(金基鎭), 박영희(朴英熙) 등이 주동이 된 이 흐름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관계하는 작가들의 전위적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조직적인 창작 활동까지 확대됐다.

10년 가량 활동했고, 이런 흐름에 반대하는 이들이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을 조직했다. 이 흐름은 우리 근대 문단에서 거의 처음 태동한 참여문학 논쟁이자, 지금까지는 다시 태동되지 않은 문학 흐름으로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그럼 거의 같은 시기에 사회주의가 밀려든 중국은 어떨까. 또 우리와 달리 자유주의가 아닌 사회주의가 국가 중심 이데올로기가 된 중국에서 그런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사실 나는 중국 근현대사 전환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만큼 텍스트를 둘러보지 못했다. 다만 읽어본 몇 권의 중국문학 개론서와 소수의 텍스트 등을 통해 그 흐름을 점검해 갈 수 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잡은 인물이 딩링(丁玲)이다.

그녀는 1904년 태어나 1986년 3월에 사망하기까지 중국 근현대 문학의 연결 고리역할을 했고, 또 창작 뿐만 아니라 문예이론 논쟁에서 정점에 있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시대를 관류했던 인물로 라오셔(老舍), 후스(胡適), 꿔모뤄(郭沫若), 빠진(巴金)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이 있으나 창작이나 사상 면에서의 변화 정치적 역정이 딩링 만큼 흥미로운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우선은 그녀를 중국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변모를 보는 키워드로 선택했다.

성적 탐익을 추구하던 삶과 절망


소녀 시절의 딩링. 난징, 상하이, 베이징을 오가던 그 시절의 딩링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소녀 시절의 딩링. 난징, 상하이, 베이징을 오가던 그 시절의 딩링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딩링기념관
딩링의 삶은 그녀와 마오둔(茅盾) 전문 연구가인 쭝청(宗誠)의 전기 ‘딩링’(다섯수레 간)을 통해 잘 소개되어 있는데, 젊은 날의 그녀를 보는 중심축은 미모의 그녀가 방종할 만큼 탐익했던 성(性)과 중국 문단을 놀라게 한 창작세계일 것이다.

먼저 1936년 난징(南京)에서 대장정군이 머물던 바오안(保安)으로 향할 때까지의 삶의 대강을 소개한다.그녀는 1904년 후난성(湖南省) 창더(常德)의 비교적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지만 1908년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가문에 맞서 성을 성메이(勝眉 수염난 남자보다 낫다는 뜻)로 이름을 무탕(慕唐 당나라 측천무후를 흠모한다는 뜻)로 바꾸는 등 독립의지를 키우고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어머니의 후원으로 딩링은 공부를 지속한다.


1918년에는 타오위안(挑源) 제 2여자 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했다가 1919년에 창사(長沙)여자중학교로 전학한다. 당시 54운동 이후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기 시작하고, 1922년부터는 상하이, 난징, 베이징 등을 다니며 취추바이(瞿秋白) 등 문인과 교류를 시작한다. 또 이시기에 루쉰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 그와 작지 않은 관계를 갖기도 한다.

1925년 딩링은 마음을 가다듬고 어머니를 만나는 한편 근공검학(勤工儉學 중국 유학생들이 프랑스 등지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형태. 덩샤오핑도 이렇게 유학했음)으로 프랑스에 가는 것을 상의하기 위해서 고향 창더에 간다. 하지만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대신에 그녀를 보고 반했다가 창더까지 따라온 후예핀(胡也頻)과 사랑을 시작하고, 1925년 가을에는 베이징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후예핀 이전에도 선충원(沈從文) 등과 교재했고, 연애나 결혼으로 자신을 구속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에게 불쑥 찾아온 사랑을 맞이하는 방식으로 동거는 적절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양대 문제작 중 하나인 ‘소피의 일기’를 1927년 겨울에 쓴다. 곰팡내 나는 하숙집에서 살아가는 소피를 통해 자신을 투사한다. 종잡을 수 없는 사고 속에서 번민하다가 자조와 자기 연민으로 결말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방황하는 당시의 신 지식인과 문인들의 삶을 잘 표출해 그녀를 문단의 중심에 끌어다 놓는다.

하지만 1928년부터 그녀는 자유연애보다는 후예핀을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고정하기에 운명은 너무 거칠었다. 1931년 1월 후예핀이 국민당의 검속에 걸려 체포되어, 2월 7일 처형되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전해 태어난 아들 쟝주린(蔣祖林)을 어머니에게 보내고, 좌익문학활동을 본격화하는 한편 11월에는 공산당원 딩슈(丁休)와 동거에 들어간다.

1933년 5월에는 딩슈가 근거지를 누설해 판자이녠 등과 체포되지만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지고, 난징 등지에서 구금되어 있다가 1936년 9월에는 당조직의 도움으로 대장정군이 종착지를 삼아 머물고 있는 샨베이(陝北)로 향한다.

사회주의 충실한 혁명 전사로

옌안문예좌담회의 기념촬영. 이 좌담회는 문학 뿐만 아니라 예술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옌안문예좌담회의 기념촬영. 이 좌담회는 문학 뿐만 아니라 예술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옌안회의60년기념회
1936년 11월 10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원톈(張聞天) 등의 환영을 받고, 당시에 홍군이 있는 바오안(保安)에 도착한다. 제법 지명도가 있는 문단의 작가가 홍군에게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환대는 남달랐다. 또 홍군과 함께 전선으로 움직이면서 창작과 문예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사회주의 문학을 시작한 시기가 이때이기도 하다. 그녀는 홍군을 따라 전선을 다니면서 ‘전선으로 가다’, ‘펑더화이 스케치’ 등을 저술한다.

이후에 다양한 출신의 문인들이 옌안(延安)에 합류했고, 시인이자 문인이던 마오쩌둥이 이 문예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옌안시절은 현대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 가운데 하나다. 물론 1949년 공산화전까지 중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 지역에서 역시 다양한 문학창작은 지속됐기 때문에 이때부터 두가지 축으로 중국 문학은 흘러가기 시작했고, 1949년 공산화와 이어서 진행된 각종 사상검열과 문화대혁명을 기점으로 중국 문학은 사실상 참여문학의 한 축으로만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옌안시절의 신문 활동 흔적. 기념관에 있는 윤전기 등이 당시의 활동을 보여준다
옌안시절의 신문 활동 흔적. 기념관에 있는 윤전기 등이 당시의 활동을 보여준다조창완
이런 참여 문학은 1942년 옌안에서 열린 옌안 문예좌담회가 그 시작점이라고 볼 만큼 중요하다. 마오쩌둥이 문인은 물론이고 모든 공산주의자에게 지식인은 환골탈퇴해 지식인으로서가 아닌 노동자, 농민, 병사의 입장에서 창작을 하고, 그 창작물은 “혁명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톱니와 나사가 되게 하고 이로써 지식인의 입장전환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마오는 ”문예가 혁명이라는 전체 메커니즘에 잘 맞아 들어가는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인민을 단결 교육시키고, 적들을 타격 소멸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등의 저술과 연설을 통해 중국 문화의 완벽한 새문화의 창조를 말했고, 이는 문학과 예술을 이데올로기의 ‘상부구조’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문인 역시 월급을 받는 지위로 만들었다. 창작은 절대적으로 당의 지도와 감독하에 놓여져야 했고, 문학을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활동의 한 축에 집어넣었다. 그렇지 않은 이는 인민의 밥버러지로 전락되었다. 그때부터 자유로운 창작은 사실상 금기가 됐다.

딩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그녀에게는 상하이나 베이징 시절 다양한 삶의 편력과 더불어 국민당에 체포되었다가 살아난 경력이 있었다. 그녀는 저명작가로서 처음 옌안에 들어왔다는 이니셔티브보다는 끌고 갈 짐이 더 많았다. 초반기 산시(山西)성과 시안(西安) 등을 오가며 선전활동을 벌였고, 마르크스레닌학원등에서 사상학습을 받기도 했다.

1936년 12월 마오쩌둥은 홍군에 와서 열심히 참여하는 딩링에게 “가느다란 붓을 무엇에 비할까/.... 어제의 문학소녀가 /오늘의 전사라오”라는 문구를 넣은 사(詞)를 그녀에게 보낼 정도였다.

1946년의 딩링. 샨시, 산시는 물론이고 광시, 후난 등을 다니면서 혁명에 열중했다
1946년의 딩링. 샨시, 산시는 물론이고 광시, 후난 등을 다니면서 혁명에 열중했다딩링기념관
하지만 그녀가 국민당 치하의 난징에서 연금생활을 했던 시간이 문제가 돼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1941년 1월에는 그 시기에도 당과 혁명에 충실한 공산당원으로 인정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해방일보’(解放日報) 등에서 일하다가 1942년 2월에는 천밍(陳明)과 결혼한다. 그해 5월부터 열린 옌안문예좌담회에도 당연히 참석한다. 공산당의 변화에 따라 그녀도 다양한 지역으로 움직이며, 조직활동과 문예활동을 벌인다.

이런 활동과 문학관은 1946년부터 쓰기 시작해 1948년 6월에 끝마친 ‘태양은 싼간허(桑干河)에 비추고’에 잘 담겨져 있다. 이 소설은 쌍간허라는 곳에 토지개혁사업이 진행되려하자 이를 기대에 부푼 농민들과 지주들의 대립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주들의 중상무략과 당 간부들의 분열을 이기고 토지개혁을 완성한다는 이 소설은 사회주의 문학창작론에 충실한 결과물이었다. 그녀는 이 소설로 1951년에는 스탈린 문예공모전에서 2등상을 수상해 국제적인 지명도를 높이기도 한다.

1949년 공산화 후 중국은 안정에 접어들고 그녀도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1955년 후펑(胡風 평생 마오쩌둥을 추숭했으나 이 논쟁에 빠져 1979년 석방까지 탄압을 받았다) 비판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반혁명집단 타도는 그녀에게도 불똥이 튀어 곤란에 빠지지만 1957년 초여름 사실 무근의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58년부터 불기 시작한 중국 정치권의 회오리는 그녀에게 정면으로 다가왔고, 6월 하순에는 백두산 근처의 베이따황(北大荒)으로 사실상 유배에 하방처분을 받는다.

사실 그녀에게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은 맞을 수도 있다. 이 하방으로 인해 1966년부터 중국에 불기 시작한 문화대혁명의 광풍의 예봉은 일단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화로 한축이 완전히 붕괴된 중국문학

라오서의 모습. 젊은 날의 그는 미국 등지에서 문인으로 명성을 높였다. 조국이 통일되어 찾아왔지만....
라오서의 모습. 젊은 날의 그는 미국 등지에서 문인으로 명성을 높였다. 조국이 통일되어 찾아왔지만....라오서기념관
1949년 10월 중국 공산화는 기존에 사회주의 문학과 자유주의 문학으로 대별되던 문학의 공산화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일단 중국 문학은 완전히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1942 년 이전에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한 궈뭐뤄(郭沫若), 예성타오(葉聖陶), 마오둔(茅盾) 등 노작가는 물론이고 아이칭(艾靑), 차오위(曹禺) 등 대부분의 작가의 창작활동은 거의 중지됐다. 물론 50년대 반동작가로 낙인된 중국 현대 사상의 거장이자 문인 후스(胡適),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林語堂), 루쉰의 지인으로 유명한 저우줘런(周作人) 등의 창작활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국당대문학사’의 저자 훙즈청(洪子誠)은 “많은 작가들의 예술 생명은 50년대 이후 사실상 끝이 났다”며 그 근거로 마오쩌둥의 문학관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배척된 것, 자기의 문학관과 생활의 체험, 예술형식이 현실의 문학 규범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점, 5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정치와 문학의 비판운동 가운데 직접적으로 화를 입었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노년의 딩링. 그녀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죽음만은 편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노년의 딩링. 그녀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죽음만은 편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딩링기념관
이들 작가의 운명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는 문혁의 시작점인 1966년 베이징의 타이핑후(太平湖)에서 시체로 발견된 라오서(老舍)같은 비극적인 인물도 있다. 뤄투오샹쯔(駱駝祥子)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다가 조국이 통일된 것을 보고 온 후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도 받았지만 문혁의 초반기 홍위병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죽은 그의 운명은 사실살 문혁을 거친 노작가나 순수 창작가들 대부분에게 시련이었다.

딩링은 문혁의 초기에 그 풍파에서 벗어나 안전하다가 1970년 베이징으로 비밀리에 압송되어 수감된다. 그랬다가 75년에는 다시 산시성 창즈(長治) 보내진다. 76년 문혁이 마무리되고 그녀도 누명을 벗는다. 그리고 79년에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정치적 복권이 이루어지고, 84년 8월에는 중앙서기처가 ‘딩링 동지의 명예 회복에 대한 통보’를 발표해 완전한 복권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거의 지쳐 있었고, 85년 7월 입원한다. 그녀는 병원에서 문학격월간지 ‘중국’의 일을 계속보는 등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다가 86년 3월 4일 영면한다.

라오서기념관. 베이징 왕푸징에서 멀지 않은 후통의 골목에 있다
라오서기념관. 베이징 왕푸징에서 멀지 않은 후통의 골목에 있다라오서기념관
그녀의 삶, 혹은 그 시대를 관류했던 문인들의 삶을 문학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다르고, 시대도 다른 이들이 쉽게 평가할 수는 없다. 또 문학의 순수와 참여를 놓고, 무엇이 옳네 그르네하는 논의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연이 되어 문학좌담회의 장소가 된 샨시성의 도시 옌안의 한켠에 자리한 양지아링(楊家嶺)을 두 번이나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회의 장 앞에는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마오쩌둥과 딩링을 포함한 중국 사회주의문학 초기 작가들의 기념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것을 제쳐두고 하나 가슴 아펐던 것은 아무런 보장을 할 수 없었던 그 당시 꿈꾸던 사회주의 문학의 초발심을 누군가부터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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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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