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수출자유지역의 전경마산시
내 고향 창원은 합포현(지금의 마산)과 함께 그렇게 창원대도호부에 속해 있다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고종 때에 창원군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창원군으로 바뀐 지 불과 60여년이 지난 1959년에 나란 존재가 그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동산부락에서 태어난다.
이 때부터 창원의 역사는 나와 더불어 쓰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와 더불어 시작된 창원의 역사는 내 나이 불과 16살 때, 그러니까 내가 막 중학교 3학년으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마치 양철조각처럼 이리저리 구겨지기 시작한다.
1974년 4월 1일, 내가 살고 있는 창원, 특히 남면벌 일대는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고시된다. 또 내가 고교 2학년 때인 1976년에는 남면벌에 경상남도 창원지구 출장소가 설치된다. 그와 더불어 기존의 창원군은 다시 옛 이름인 의창군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1974년 봄부터 남면벌 일대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매일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어야 했다.
"허어~ 참! 창원군의 팔자도 더럽게 사납다카이."
"우짤끼고. 창원이란 이름을 시와 군이 꼭같이 쓸 수는 없다 아이가. 하기사 창원군의 입장에서 보모 참으로 기가 차겄지."
"아, 지 품에서 시로 세 개나 독립시켰으모 창원군도 지 몫은 다한 거라고 봐야지 뭐. 그라고 보모 창원군이나 우리들이나 그 팔자가 그 팔자 아이가."
그랬다. 창원시와 마산시, 진해시는 모두 창원군에서 떨어져 나왔다. 하나의 군에서 세 개의 시가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창원군은 의창군이 되었다가 1995년에는 인근 창원시와 마산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떼내준 뒤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부모처럼 그렇게 말이다.
나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 그 창원군 상남면에서 태어났다. 나는 음력으로 1959년 12월 4일에 태어났다. 양력으로는 1960년 1월 2일이었다. 나란 존재가 태어난 이틀 뒤에는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작가 알베르 까뮈가 자동차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했다.
알베르 까뮈...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와 악의 문제, 그리고 죽음 등을 이야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 의식과 환멸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까뮈는 1957년에 '이방인' '페스트' '시지프스의 신화' 등 그가 쓴 모든 작품에 대해 노벨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 3년 뒤에 57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57... 참으로 우연 치고는 희한한 우연의 일치였다.
"우리도 지금 이라고 있을 때가 아이라카이."
"와? 또 오데 난리라도 난다 카더나?"
"하모. 지금 마산에서는 난리가 크게 났다 아이가."
"마산에서? 마산에서 머슨 난리가 또 났다 말이고?"
"난리라 캐서 그런 난리는 아이고, 시방 마산에서는 갈대밭하고 마산 앞바다를 다 막쿠고(메우고) 있다 아이가. 그라고 그 자리에 자유수출이라카는 큰 공단이 들어서고 있는데, 중핵교 졸업장만 있는 아(아이)는 누구나 다 취직시켜 준다꼬 난리가 났다 아이가."
내가 코흘리개 시절, 하루는 택호가 진해댁이라고 불리우던 내 친구의 어머니께서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그렇게 마구 떠들어댔다. 진해댁은 마산 어시장에서 고기를 떼다가, 그걸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파는 분이었다. 당시 그분의 말로는 자유수출이라는 공단이 어찌나 넓은지, 한번 구경을 하려면 도시락을 싸들고 하루종일 그곳을 돌아다녀도 모두 구경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마산... 마산이란 이름 또한 그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마산이란 이름은 1760년 영조 36년에 조창을 설치하면서 '마산창'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또한 본격적으로 '마산'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90여 년 전부터다. 1899년 일제에 의해 마산포가 개항하고, 15년 뒤인 1914년에 마산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1905년에는 일제에 의해 마산과 삼랑진간의 군용철도가 개통되었고, 1909년에는 '가고파'를 지은 이은상 시인의 부친에 의해 마산 최초의 사립학교인 창신학교가 설립된다. 1911년에는 진해군항의 설치로 마산항이 폐쇄되었고 1949년에 와서야 비로소 오늘의 독립된 마산시로 승격된다. 이와 더불어 마산항도 다시 개항을 한다.
이후, 마산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몽고간장이 마산에 들어선 이후 1960년대 중반에는 한일합섬과 대림요업 등이 들어섰고, 1974년에는 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서게 된다. 수출자유지역은 동경전자를 비롯한 일본의 전자공장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수출자유지역은 일본이 시설 일체를 설치하여 사용하다가 몇 십 년 뒤 그 시설 그대로 우리나라에 반환하는 일종의 임대형 공단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일본에서 처치 곤란한 그런 공해성 산업이 마산에 들어온 셈이었다.
그때부터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는 그 마산 앞바다는 서서히 병들기 시작한다. 몽고간장에서 매일 같이 흘러내리는 폐수, 그 폐수는 그래도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조금은 있었다. 고구마를 썰어 말린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한일합섬에서 쏟아지는 '칼라색 물', 그 칼라색 물이 하루종일 마산 앞바다를 옷감처럼 물들였고, 그것도 모자라 수출자유지역에서는 하루종일 납덩이를 마산 앞바다로 흘려보냈다.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이따이 이따이
아아
바다의 유언
이따이 이따이
(이선관 '독수대' 모두)
1974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이선관 시인은 우리 나라 최초의 환경시 '독수대'를 발표하면서 마산 앞바다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준엄하게 경고한다. 하지만 시인이 아무리 악을 쓰면서 고함을 질러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또 당시만 하더라도 환경파괴라는 그런 말조차 잘 사용하지 않았을 때였고, 무엇보다도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