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살아계시는 아버지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34> 49제

등록 2002.12.16 19:51수정 2002.12.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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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월 한번 정말 빠르네"
"날씨 한번 좋~다. 요새 한 며칠 옹골차게 춥더니만 오늘은 왜 이리 포근하나 했더니, 그게 누구 아버님 땜에 그랬구나"
"그래요. 하늘도 새파랗고 날씨까지 이렇게 포근하니, 하늘나라로 올라가기에는 딱 좋은 날씨지요."


그날은 오랜만에 날씨가 무척 맑고 포근했다. 나뭇잎 하나 없는 잔가지를 새파란 허공에 그물처럼 펴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금방이라도 파아란 움이 툭, 투툭, 하고 터져 올라올 것만 같은 그런 날씨였다. 문득 어디선가 아지랑이가 봄꽃을 데리고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12월 13일, 지난 주 금요일은 49일 전, 그러니까 지난 10월 26일 오전 7시 38분에 한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을 버린 내 아버지 49제를 지내는 날이었다. 49제는 절에서 하는 49재 천도재와는 조금 다르다. 49제는 삼오제 때 비록 탈상을 했지만, 돌아가신 분의 49일째 되는 날에 자식들과 친척들이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며 제사를 지내는 그런 날이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49제에 참석하지 못하는 줄만 알았다. 왜냐하면 날짜가 금요일인데다가 내가 일하는 경주는 창원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내가 금요일에 창원으로 내려가게 되면, 토요일까지 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내가 밥벌이를 하고 있는 이 곳은 토요일에도 오전까지는 일을 해야 했다.

"접니다."
"아, 예. 내일 오기가 어렵겠지요? 그렇찮아도 형님도 아마 오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던데..."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는 몇 시에 지냅니까?"
"밤 9시경에 지낼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제가 도착할 때까지 좀 기다려 달라고 하십시오."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할게요."

사실, 나는 아버지 49제를 금요일 오전에 지내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오후에는 아버지 산소에 가는 것으로 알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목요일 밤이나 금요일 이른 새벽에 경주를 출발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금요일과 토요일을 내리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에 직원들 눈치가 보여 내 딴에는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차암! 이 사람도 못 말릴 사람이구먼."
"아니, 왜요?"
"아무리 밥벌이도 중요하지만, 아버지 49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그렇게 슬쩍 넘어가려고 덤벼들어? 그리고 그게 어디 직원들에게 눈치 보일 일이야?"
"그래요.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다녀오세요. 그렇게 서 계시면 오히려 저희들이 더 불안해요."

그날, 나는 오후 3시에 사무실에서 출발, 경주 터미널에서 오후 4시10분 발 마산행 버스를 탔다. 턱이 꺼칠꺼칠했다. 어제, 밤 11시가 넘어서야 부산에서 올라온 박 사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 잤다. 갈증에 새벽에 몇 번씩 깨다가 아침에 일어난 시간은 8시 30분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그래서 토끼처럼 얼굴에 물칠만 한 채 그냥 그대로 사무실로 내려왔던 것이다.


차는 어느새 언양을 벗어나 있었다. 이대로 별 탈 없이 달려가면 마산 도착 6시 10분... 넉넉하게 잡아도 7시 10분쯤이면 창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아버지 49제를 지내기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일단 집에 도착하면 수염부터 깎고 샤워를 한 뒤, 두 딸을 데리고 큰집에 가면 되겠다. 그 시간이면 아내도 큰집에 미리 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그런 기대는 순식간에 깨지기 시작했다. 언양을 지나 양산 통도사 근처에 이르자, 줄지어 선 차량들이 말 그대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하얗게 끼는 성에를 몇 번이나 닦아낸 그 차창 밖의 하늘 한가운데에는 솔개 한 마리가 점처럼 박혀 있다. 솔개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대로 하늘이 되고 싶은 것일까. 내가 탄 버스처럼 저 하늘에 떠있는 솔개도 아예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세요?"
"나야, 문 열어?"
"앗, 아빠다. 아빠가 오늘 어쩐 일로..."
"빨리 옷 갈아입어."
"아항~ 친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큰집 가는 날이구나"
"아빠! 그럼 내일은 집에 있겠네?"
"그래. 하지만 오후에는 약속 때문에 나가봐야 돼."
"그럼 내일은 술 적게 마시고 들어와야 돼, 자~ 약속."

수염만 대충 깎고, 두 딸을 데리고 큰집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밤 8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형님과 동생들, 형수님과 재수씨까지 모두 모여 한창 제삿상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재고 파악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했던가. 그래. 나는 큰집에서 제삿상을 차릴 때마다 늘 미안했다. 아내 또한 그랬다. 하지만 어쩌랴. 모든 것이 내가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치러내야 하는 인과응보인 것을.

"하긴, 지금의 아버지에게 49제가 무슨 소용 있겠어. 우리가 아무리 잘 떠받들어도 저렇게 말이 없는 것을..."
"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의식이지요. 이렇게라도 해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안 그러면 늘 뒤가 켕길 거 아닙니까."
"그래. 니 말이 맞다."
"차암~ 그러고 보니 벌써 한 세대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네."

아버지, 이제는 세상 걱정 모두 거두고 그렇게 편안히 쉬십시오. 이제는 사진 속에서 자식들이 차려주는 상을 받으시는 아버지.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 아버지. 정녕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 맞습니까. 금방이라도 사진 속에서 '너거들 왔냐', 하시며 은니를 드러내며 잔잔한 웃음을 흘리실 것만 같은 아버지. 이제 그렇게 어머니 곁에 누워 편안하게 쉬십시오.

"큰 대접 하나 달라 해라."
"왜, 아빠?"
"비벼 먹게."
"아빠! 나도 비빔밥."
"나도, 나도, 저두요."

우리 형제들은 제사를 지낸 뒤, 여러 가지 나물과 탕수를 넣고 비벼먹는 것을 좋아했다. 피는 역시 속일 수가 없는가 보다. 아버지의 손주들 역시 그랬다. 제사음식을 넣고 비벼먹는 그 비빔밥은 일반 비빔밥과는 맛이 많이 달랐다. 제사음식 특유의 독특한 맛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반 비빔밥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제사 지낸 뒤에 비벼먹는 이 비빔밥을 특히 좋아했다.

"아, 오죽 맛이 있었으면 헛제삿밥까지 있을라고."
"어떤 사람들은 이 비빔밥에다 일반 비빔밥처럼 고추장을 넣어 먹는 사람도 있던데?"
"그거야 말로 제삿밥의 독특한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지. 제삿밥은 뭐니뭐니 해도 큰 대접에 나물하고, 김치 약간에다 탕수국을 붓고, 이렇게 쓱쓱 비벼서 여럿이 나눠먹는 맛, 이 맛이 진짜배기 맛이라니까."
"그리고 비빔밥을 입에 넣고 요렇게 삶은 고기 한 점을 같이 먹어보라니까."

아버지의 젯상에 올린 술로 음복을 하고, 아버지의 젯상에 올린 음식으로 제삿밥을 먹은 그날 밤, 밤 11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감싸고 있는 밤공기는 유난히 포근했다. 그리고 문득, 이층집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검붉은 홍시 하나가 보였다. 자세히 바라보니 이미 까치가 몇 번 쪼았던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본 아버지의 그 무너진 얼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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