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2)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14) 청록파 시인 조지훈

등록 2002.12.29 22:24수정 2002.12.3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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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선비, 지훈 조동탁 선생
단아한 선비, 지훈 조동탁 선생박도
나는 선생의 시 가운데 돌아가실 무렵의〈병에게〉를 가장 좋아한다. 병을 향한 조용한 속삭임에는 그분의 달관한 삶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 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 그려.
-〈병에게〉



나는 또 선생의 산문〈지조론〉을 좋아한다. 이 글에는 대쪽같은 선비의 얼이 담겨 있다.

변절을 밥먹듯 하는 해바라기형 지식인이나 이 당이 좋을까 저 당이 좋을까 아무런 이념도 소신도 없이 창녀보다 못한 얄팍한 이해에 따라 옮아다니는 철새 정치꾼들에게는 촌철살인의 글로써, 흐려져 가는 시대의 양심을 깨우침과 아울러, 모름지기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는 글이기 때문이다.

지조(志操)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신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조론〉


선생은 한때 ‘정치 교수’로 몰려 대학을 떠났다. 선생이 없는 대학은 텅 빈 듯했다.

선생이 다시 강단에 돌아왔을 때는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다. 그래서 2학년 2학기 선생의〈문학개론〉은 한 학기 내내 두 시간밖에 듣지 못했다.

내가 뵌 선생의 마지막 모습은 돌아가시기 전 해 여름이었다. 늘 병환으로 결강하던 선생이 그 날은 교문을 지켰다. 그 해 여름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로 유난히도 맵고 지루했다.

교문 앞은 교통이 차단된 채 무장한 군인들이 길을 메웠고, 교내에서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정을 휘돌았다.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선생은 흰 남방 차림으로 병색이 역력한 얼굴에는 비지땀을 쏟으며 굵은 테 안경을 연신 벗어 땀을 닦았다. 데모 대열의 선두가 철책 교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자 선생은 두 팔을 벌려 학생들 앞을 가로막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절규했다.

“너희들 나가면 죽어!”
“너희 맘 다 알아!”
“안 돼! 죽는다 말야.”

선생의 울부짖음이 쟁쟁하다. 지금도 선생을 회상하면 그 때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듬해 봄, 선생은 이승을 떠났다. 그 날은 촉촉이 비가 내렸다. 교정에 마련된 영결식장에는 목월 선생의 조시(弔詩)가 낭랑히 흘렀다.

나는 경기도 마석 송라산 멧부리에서 선생의 하관을 지켜보았다. 이 땅에서 선생의 육신이 가신 거다. 다시는 반코트 차림의 선생의 모습을 교정에서 볼 수 없었다. 선생의 자작시 낭송도 해학도 무불통지의 강의도.

선생은 지인달사(至人達士)였다. 지금도 나는《조지훈 전집》을 서가 맨 앞에다 꽂아두고 이따금 선생의 육성을 듣는다.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연해야지.

난 너를 구경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
통곡과도 같은 낙조가 물들고 있다.
-〈동물원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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