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에서 나온 물감 (1)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17)

등록 2003.01.03 19:40수정 2003.01.0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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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생강나무꽃

생강나무꽃 ⓒ 임소혁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박도 선생님 댁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선생님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박도입니다.”


“선생님, 남영입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남영이?! 그럼, 장남영이냐?”
“예, 그렇습니다. 20여년 전 제자를 여태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축구 잘 했잖아. 중1 때 학급 대항 결승전에서 네가 선취골을 넣었는데, 3반 선수들이 핸들링 반칙을 했다고 항의해서 주심이 노골을 선언하자, 네가 운동장에 드러누운 채 데굴데굴 구르면서 분통을 터뜨렸잖아.”
“우와, 우리 선생님 기억력 짱입니다.”

반가운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장군은 내가 군에서 제대한 이듬해인 1972년 오산중학교에 부임하여 첫 담임을 했던 제자였다.

나는 그들을 3년 간 줄곧 가르쳤고, 그들의 졸업과 동시에 그 학교를 떠났다. 30여 년 간 가르친 수많은 제자 중 유독 그 때 제자를 많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의 첫 정이 듬뿍 든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뵙고 싶습니다. 내일 시간 좀 내 주십시오.”
“전화만이라도 고맙다.”
“아닙니다. 오늘 선생님과 통화하고자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한 시간 전부터 오산학교다 중동고등학교다 교육청에다 다이얼을 돌린 끝에 간신히 연결되었습니다. 제 어머님도, 집사람도 꼭 찾아뵈라고 했습니다.”

“나도 보고 싶긴 해. 하지만 내일만은 피하고 싶다.”
“정히 그러시면 내주 월요일은 어떨까요? 제가 신촌 쪽으로 가겠습니다. 장소는 선생님 편하신 대로 말씀하십시오.”
“정히 그렇다면 오후 7시 정각에 그레이스 백화점(현 현대 백화점) 커피숍에서 만나자.”


마침 약속한 날이 공교롭게도 백화점 정기휴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백화점 정문 앞에서 장군과 20여년만에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눴다.

“선생님, 중3 때 반장이었던 강상욱이도 오늘 나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걔 회사가 수원에 있기 때문에 8시까지 오기로 했어요.”


‘혼자 나올 것이지 하필 강군과 나올 게 뭐야’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곧 '잘 했어. 이 참에 그 녀석을 만나서 지난 일을 사과해야지'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a 노랑제비꽃

노랑제비꽃 ⓒ 임소혁

나는 강군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꼭 어린 토끼처럼 귀여웠다. 하지만 졸업식을 앞둔 그 날의 일만 떠오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내가 교사였다는 게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 선배 교사인 아무개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이번 반장들 눈치를 보니까 졸업식 날 양복 한 벌 얻어 입기는 틀렸어요. 마침 내일이 학생들 장학적금 찾는 날이니까 내가 반장들 불러서 귀띔을 할 테니 선생들은 그냥 모른 척 하세요.”

다음 날 은행 직원으로부터 반 전체의 예금액을 건네 받은 담임들은 아무개 선생의 말대로 반장에게 모두 인계했다.

반장·부반장들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예금액을 나눠주면서 즉석에서 일정액의 성금을 거둔 모양이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12명의 반장 중 강군과 또 다른 반장 한 명이 아무개 선생에게 항의하기 위해 교무실로 찾아왔다. 항의 내용인즉, 반 아이들 중에 반발하는 녀석들이 적잖다는 것이다.

“얘들아, 담임 선생들이 일년 동안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졸업 때 담임 선생에게 양복 한 벌 해드리는 건 예의야. 반발하는 아이들을 잘 설득시키는 게 반장의 지도력이야.”

아무개 선생의 견강부회 말에 두 반장은 머쓱한 채 교실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차마 그 장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비겁하게 못 들은 척 외면해 버렸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의 야생화' 사진 게재를 허락해준 사진작가 임소혁씨는 지리산 자락 왕시루봉에 있는 산장(A텐트)에서 지내면서 오로지 지리산을 시로 필름으로 담아내고 있다. 임 작가가 펴낸 책으로는 <일출집><한국의 지리산-CD롬> (한빛 미디어) <쉽게 찾는 우리산>(현암사)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다른우리) 등이 있다.

덧붙이는 글 '지리산의 야생화' 사진 게재를 허락해준 사진작가 임소혁씨는 지리산 자락 왕시루봉에 있는 산장(A텐트)에서 지내면서 오로지 지리산을 시로 필름으로 담아내고 있다. 임 작가가 펴낸 책으로는 <일출집><한국의 지리산-CD롬> (한빛 미디어) <쉽게 찾는 우리산>(현암사)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다른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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