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포복으로 동굴을 탈출하다

<유라시아여행기> 라오스 '왕위앙'에 가다 (1)

등록 2003.01.06 04:01수정 2003.01.1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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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비된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의 움직임은 부드러웠다. 라오스 여행에서 보기 드문 깔끔한 도로 위를 달리니 우리와 별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영락없는 시골길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사이로 각 부락마다 뛰어노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라오스가 뿜어내는 매력은 이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장면들이다. 창밖으로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그들의 표정에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마을을 지나 어느덧 버스는 안개를 헤치며 산길을 올라간다. 산중턱엔 구름처럼 곱게 앉아 있는 안개로 자욱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뿌연 공기를 뚫고 버스는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뿌연 안개가 걷히자 기기묘묘한 산봉우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들풀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 사이로 고산족 사람들이 머리에 풀잎을 하나 가득 이고 지나간다. 살짝 버스를 피해 지나가며 미소를 건넨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국경을 초월한 대화는 미소뿐이다. 미소 앞엔 그 어떤 경계심도 곧 풀리고 만다.

a 소계림이라 불리우는 왕위앙의 풍경

소계림이라 불리우는 왕위앙의 풍경 ⓒ 홍경선

그렇게 평화로운 산길을 달리다보니 어느덧 왕위앙에 도착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엔티안 근교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이 곳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인해 해마다 여행자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자들을 통한 구전효과는 이곳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지금은 이곳의 주민들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다고 하니 자칫 때묻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이 상처받을까 두렵다.

주말이라 그런지 정거장에 도착한 버스마다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비엔티안 시민들도 이곳으로 많이들 놀러온다고 한다. 이젠 여가생활을 즐길 만큼 여유로운 사람들이다. 아침 일찍 떠나느라 식사를 하지 못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이해 시내로 나왔다. 시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우리나라의 강촌과 같은 마을이었다. 오직 수려한 자연환경만이 있을 뿐이다.

쏭강에 돌출되어 있는 동굴과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석회암산들로 이루어진 자연환경은 이 조그마한 마을을 중국의 계림과 비교하며 소계림이라 불리게 했다.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맛보기 위해 자전거를 빌렸다. 천천히 걸어다니기에는 쏭강 건너편의 마을과 동굴들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는 느낌이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다가와 귓가를 어루만진다. 상쾌한 기분이 느껴지는 이 자연이 좋다. 비엔티안의 모래먼지도 자동차에서 내뿜은 뿌연 매연도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다.

골목으로 살짝 꺽어들어간 곳엔 기다란 대나무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밑으로 쏭강이 흐른다. 저만치 다리 건너에 낮은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늘은 유난히도 낮아서 산 정상에 구름이 앉은 듯하다. 구름도 쉬어갈 정도로 이곳의 풍경은 수려했다.


좁은 다리 위로 곡예를 펼치는 마냥 조심스레 건너다보니 중간 지점에서 통행료를 받는다. 마을 너머 또 다른 세상에 다가가고픈 욕심에 망설임없이 통행료를 지불했다. 기다란 다리를 건너고 나면 또 다른 다리가 등장한다. 역시나 통행료를 받고 있었지만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걷는 것이라 한다.

길이 나 있는 곳으로 한참을 달렸다. 어릴적 동요로 불러왔던 과수원길의 노랫말이 절로 떠오르는 풍경이 펼쳐졌다. 뒤로는 유유히 흐르는 쏭강이 있고 길 양 옆으로 카르스트지형으로 쭉 뻗어있는 산들이 버티고 있다. 실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나지막한 산들. 여기저기 단체로 몰려다니는 물소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그들에게선 오직 한가로움만이 느껴진다.

조그만 막대기를 들고서 돼지엉덩이를 때려가며 쫓고 있는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절로 지어지는 미소때문인지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바이디'를 외쳤다.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이 "사바이디∼"하며 답례를 한다. 수줍어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닭과 어우러져 놀고 있는 칠면조들. 치앙마이에서 보던 고산족 마을의 모습이 여기 이 길의 양옆에서 한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초가집 마을에 들어서니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라오족 사람들이 보인다.

사바이디를 외치며 손을 흔드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전해진다. 여기저기 집을 보수하거나 물을 기르거나 그냥 앉아서 노닥거리는 등 저마다 자신들의 일로 분주했다. 하지만 그 어떤 행동에서도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한없는 여유로움만이 느껴질 뿐이다.

간간히 경운기나 오토바이 트럭이 많은 사람들을 싣고서 지나간다. 뿌연 흙먼지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도중에도 역시나 사바이디를 외친다. 언제 어디서나 밝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낯선 이방인을 환영해주는 그들의 여유로움이 부럽기만 하다.

자갈밭 위를 달리다 보니 엉덩이가 저려왔다. 달리는 것보다 걷는 것이 나을 듯 싶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을까. 어느덧 동굴이정표가 나왔다. 무수히 자라 있는 나무와 바위들로 가득한 길을 지나 자전거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둔 후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걸으니 동굴입구가 나왔다.

겉에서 보기에는 동굴 같지도 않다. 그저 조그만 산에 구멍을 뚫어놓은 듯했다. 출구에는 외국인 세명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이 고생한 것 같다. 그들에게 동굴의 상태를 물어보니 일단 한번 들어가보라며 연신 미소만 짓는다.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듯이.

밧데리와 조잡하게 이어붙인 광산용 손전등을 받아들고 사다리를 타고 본격적인 동굴탐험에 들어갔다. 안내인 한 명 없이 혼자서 하는 동굴탐험이 낯설었다.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이내 손전등을 잡고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깜깜한 입구에 들어서자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직 손전등 불빛 하나만을 의지한체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가며 더듬거렸다. 차가운 종유석들의 촉감이 전해진다. 거칠거칠한 표면을 쓰다듬으며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간다.

a 동굴속의 불상

동굴속의 불상 ⓒ 홍경선

동굴 바깥은 숲으로 둘러싸여 잘 몰랐지만 안에 들어와보니 석회암 동굴이었다. 이정표 하나 없이 그저 뚫려 있는 구멍을 따라 무작정 들어가본다. 손전등 불빛 사이로 간간히 드러나는 종유석의 기괴한 모습들이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순간 손전등의 불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 불빛마저 꺼진다면 길을 찾지 못한 채 영원히 미아가 될 것이다.

다행히 밧데리의 생명은 끈질겼다. 한참 동굴 이곳저곳을 헤맸을까. 손전등의 불빛 사이로 기괴한 불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기괴스럽게 생긴 모습이 주변환경과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둔 동굴 사이로 박쥐떼가 날아올 것만 같다. 정확한 이정표 없이 사방에 구멍이 뚫려 있고 천장에선 날카로운 종유석들이 내려다본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눈앞에 닿아 있는 종유석들을 붙잡고 다시금 길을 나섰다.

저멀리 조그만 입구가 보이기에 기어들어가니 막다른 곳이었다. 더 이상 길을 찾을수가 없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에 미치자 순식간에 칠흙같은 어둠에 휩싸이며 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서둘러 나오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천장쪽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기에 미끄러운 종유석들에 발을 디디며 올라갔다. 조그만 방심해도 날카로운 종유석에 떨어질 수 있어 움직임 하나하나에 조심해야 했다.

호기심에 들어간 동굴이 이렇게 생명을 담보로 탈출해야 하는 곳이었다니. 실로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다. 간신히 오르고나니 이번엔 내리막길이 나온다. 사방이 귀뚜라미 천지였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귀뚜라미의 촉감에 소름이 끼쳤다. 두려운 마음에 사지를 동굴벽에 바짝 붙인 채 미끄러지며 내려오니 아까 그 지점과 이어져 있는 통로로 돌아왔다. 이렇게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왔다니. 극한 상황 속에 머리마저 굳어버렸나보다.

주변에 사다리나 나무판자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길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또 다시 막혀버리고 아래로 어린아이가 간신히 통과할수 있을 만큼 작은 통로뿐이었다. 산넘고 산이 아닐 수 없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마지막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한 손전등의 불빛도 구멍 너머까지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봐선 아무래도 길이 있는 것 같았다. 응용포복으로는 엉덩이가 빠져나가지 못하기에 낮은 포복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차가운 석회암에 닿은 배는 물론이고 등에 닿은 귀뚜라미의 울름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작은 귀뚜라미 녀석들이 이렇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은 구멍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드디어 공포의 순간을 벗어났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간신히 통과한 길목에는 또 다시 두 개의 갈림길이 나 있었다. 망연자실한 순간이었다. 온몸이 힘이 주욱 빠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이대로 라오스의 조그만 동굴에 뼈를 묻혀야만 하는가. 순간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안내인 없이 자신만만하게 들어온 것에 대한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a 드디어 동굴을 탈출하다

드디어 동굴을 탈출하다 ⓒ 홍경선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나선 것인가에 대한 상심으로 지쳐 있을 즈음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자 인기척이 더욱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안내인과 세 명의 서양인 관광객들이었다. 실로 구원의 손길이 아닐 수 었다. 구원자의 움직임에 따라 마지막 힘을 다하여 움직였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알고보니 좀전에 막혀 있던 것으로 착각하고 포기했던 곳이었다. 그 조그만 구멍을 낮은 포복으로 빠져나가니 드디어 출구가 나왔다.

저만치서 눈부신 햇살이 비춰 들어온다. 빛줄기로 이어진 사다리를 타고 밖으로 나오니 흙투성이가 된 온몸엔 땀이 비오듯했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이렇게 좋은지 미쳐 몰랐다. 세상은 무척이나 밝았다. 고요한 주변의 공기와 햇살의 따사로움이 이토록 소중할 줄이야. 새삼 주변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졌다. 드디어 험난한 동굴을 탈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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