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길에 오르는 걸까?

[까탈이의 세계여행-첫 회]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등록 2003.01.15 14:20수정 2003.01.1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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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6월 10일부터 30일간 우리 땅 우리 마을 800km를 걸으면서 '국토종단 여행기'를 써서 많은 화제를 모았던 '까탈이' 김남희 기자가 드디어 오랜 계획과 망설임 끝에 '세계여행'을 떠납니다. 김 기자는 앞으로 5년 동안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한달에 4회 정도 여행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 기간 동안 김 기자는 오마이뉴스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만나는 색다른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기사와 사진으로 전해줄 것입니다. 김남희 기자를 따라가는 5년간의 세계여행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편집자 주>

나는 벼랑 위에 혼자 서 있었다. 길은 외줄기, 절벽은 가파르고 높았으며 내려다보는 바닥은 아득했다. 그 절벽을 건너야만 하는데, 발은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벽을 잡고, 한 발을 떼었다 다시 내리기 수 차례.


지난 11일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출국심사대로 들어가는 김남희씨.
지난 11일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출국심사대로 들어가는 김남희씨.오마이뉴스 이종호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나는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었고, 그런 나를 밀치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 절벽을 쉽게도 건너가고 있었다. 망설이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흐르고, 나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힘겹게 첫 발을 디딘 나는 절벽을 건너기 시작했다.

가파른 절벽에서 마지막 한 발을 남겨놓고 뒤돌아보니, 내가 건너온 길은 절벽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평지보다 아주 조금 높은 상자 위에서 한 발을 못 떼고 허우적거리고 서 있었던 거였다. 그곳은 커다란 방이었다. 어이없어 하는 나를 바라보며 한 노인이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도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웃고 있었다.

"별 거 아니지? 그렇게 일단 시작하면 되는 거야. 자, 이제 이곳으로 가면 모든 일이 잘 될 걸세."

노인이 건네주는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받아들고 나는 잠에서 깼다. 꿈치고는 참 묘한 꿈이었다. 회사를 사직하고, 마침내 오래 준비해온 여행의 시작을 열흘 남짓 남겨놓았던 그때. 나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인사를 하기 위해 친구와 선배들을 만나고, 마지막 준비를 하는 동안에 나는 갑자기 막막하고 외로워져서 한밤중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여행이었기에, 마냥 설레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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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꿈은 꿈으로만 남겨두어야 옳았던 걸까? 무얼 보겠다고, 무얼 얻겠다고, 이 길을 가는 걸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이제 집도 없고, 돌아갈 직장도 없고, 돈도 한 푼 없이, 나이만 들어있을 텐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중국 청도의 바닷가 모래밭에서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수영복 차림으로 몸매를 드러내고 있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국 청도의 바닷가 모래밭에서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수영복 차림으로 몸매를 드러내고 있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김남희
도대체 내 안에 어떤 존재가 있어 나를 이렇게 끝까지 몰아가는 걸까? 나는 왜 작고 소박한 일상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두려움에 몸서리가 처지고,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못 간다며 주저앉힌다면 기꺼이 못 이기는 척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런 불안 끝에 그 꿈은 내게 왔다.


꿈을 꾸고 난 아침,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내게 남은 길은 내가 선택한 이 길에 오르는 것뿐이라는 것을, 길 위에 서면 결국엔 모든 일이 잘 풀리고야 말 거라는 막연한 생각들과 함께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몇 년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며 버텨도 봤지만, 뜨거운 모래밭의 자갈돌처럼 내 마음 한 구석은 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갈망으로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 길을 지켜보며 말리지도 못하는 늙으신 부모님. 이번에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나 보다하고 나는 편한 대로 해석하며 지냈는데, 떠나기 전 볼일을 보고 밤 늦게 들어간 날, 막내동생은 나를 타박했다. 그 나이에 부모님이나 울린다고.

오후 내내 우셨다는 엄마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고, 뺨은 빨갛게 달아 있었다. 가슴이 저미듯 아파왔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이 길에 오르는 걸까? 새삼스러운 질문들이 나를 다시 붙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왜 떠나는 거냐고? 그저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었노라고, 아직 내 안에 세상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호기심이 남아있을 때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다는 말밖에는 되돌리지 못했다.

@ADTOP2@
청도 해변가의 풍경. 바닷가 너머로 멀리 중국 경제 발전의 상징인 신시가지가 보인다.
청도 해변가의 풍경. 바닷가 너머로 멀리 중국 경제 발전의 상징인 신시가지가 보인다.김남희
서정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길이었다. 길 위에 서면 언제나 내 가슴은 뛰고, 더 넓어지고 순해진 나는 타인을 향해 쉽게 문을 열고는 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 그것이 내 삶을 여기까지 몰고 왔다.

이제 다시 길 위에 오른다.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쑥스럽게 웃으며 금방 돌아올지도 모른다. "문 밖에 새삼스러운 것은 없더라"고 말하며.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늙고 지친 몸으로 돌아올 지도 모르고. 다만 내 마음이 원하는 데까지 가겠다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만을 찾아 이 길 위에 서 있겠다는 것뿐.

언제 돌아오겠다는 허튼 약속도 할 수 없고, 기다려달라는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나는 다시 배낭을 꾸렸다. 배낭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노트북과 렌즈 두 개가 달린 디지털 카메라만으로도 짐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져 있었다.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어깨가 쓰려왔고, 짐의 무게가 자꾸 마음을 짓눌렀다. 길 위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이 얼마나 성실하게 지켜질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물리적인 요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쓰지 못할 수도 있겠고, 때로는 그저 쓴다는 일에 지쳐 노트를 덮은 채 다닐지도 모르겠다.

인천에서 청도, 상해를 거쳐 영파로 들어오는 3일간의 여행을 함께 했던 이윤주, 이정의 자매와 영파의 한국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의 후배 현경산
인천에서 청도, 상해를 거쳐 영파로 들어오는 3일간의 여행을 함께 했던 이윤주, 이정의 자매와 영파의 한국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의 후배 현경산김남희
다만 먼저 이 길을 간 한 선배 여성의 글을 읽으며 용기를 얻고, 막연했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타전하는 이 보잘 것 없는 글들이 나 아닌 누군가에게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넘치는 위로가 될 것 같다.

집을 나서며 나는 알고 있다. 길 위에서 내가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 낯설고 외로운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 만나는 건 결국 나 자신. 간절한 것들만을 남긴 채 맨 얼굴로 대면하는 나. 결국 내가 찾고자 하는 건 내 안의 또 다른 나, 내 안의 부처일 뿐.

이 길 위에서 텅 빈 나를 가득 채워 돌아가는 날, 바람만을 담은 깃발처럼 가볍게 나부끼며 돌아갈 수 있기를...

덧붙이는 글 | 2003년 1월 12일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까탈이가 쓰다

덧붙이는 글 2003년 1월 12일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까탈이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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