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조리 사세요! 복 사세요!"

섣달 그믐부터 대보름까지 복조리 장사가 서넛은 지나갔다

등록 2003.01.23 09:35수정 2003.01.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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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복조리 한 쌍

복조리 한 쌍 ⓒ 김규환

복조리 팔기는 섣달 그믐을 며칠 앞두고 미리 절어 뒀던 조리와 주먹밥을 지게에 지고 하루 백리 길을 걸어야 하는 대장정이다. 주먹밥이랬자 별 거 아니다. 소금간을 짭쪼름하게 해서 고춧가루 조금 곁들인 단무지 모양을 하고 섞박지 비슷한 '바개지'의 뿌리 부분을 길고 큼지막하게 잘라 밥에 하나 넣고 김을 구워 그냥 뭉쳐 싸면 주먹밥이다.


새벽밥을 먹고 출발해도 실한 사람 아니면 해지기 전에 광주에 도착하기 힘들다. 해가 지고 난 뒤에 도착하면 큰 낭패를 보기 때문에 서로를 재촉하여 지금 교도소 근처 문화동을 통과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이미 발이 물러 터졌다. 산길을 넘고 넘어 들길을 가로질러 하루를 넘기고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무작정 나가 파는 험난한 고난의 시작이다.

몇 년 집을 나가 있던 사람마저도 돌아오던 때가 섣달 그믐인데 화순 북면 백아산 주변 사는 복조리 장사는 설을 며칠 앞두고 이렇게 집을 나서는 것이다. 미리 절어 뒀던 조리를 그늘에서 바짝 말려야 짐 무게를 조금 줄일 수 있다.

한 번 나선 마당에 다 팔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기도 좀 뭐하다. 일단 나선 길 끝장을 보고와야 면목이 선다. 한 번 나서면 정월 대보름까지는 팔기로 작정하고 나서야 한 몫 제대로 건질 수 있다. 동네 청년 서너 명에 그보다 대여섯 살 많은 형님 뻘 되는 아저씨 한 분이 조장이 되어 작전을 수립한다.

"대문이 일단 높은 집, 밤에도 불이 켜진 집, 개가 짖고 있는 집이 몰려 있는 잘사는 동네로 가라", "광주는 산수동 주변을 돌고 나주는 한 이틀이면 충분하다. 목포는 삼학동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그리 가거라", "집앞에 사람이 나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복조리 샀쇼?'라고 자신있게 말하라"

첫날은 엄니가 챙겨준 돈이 조금 있어 추렴하여 조그만 여인숙 방 하나를 빌렸다. 부르튼 발을 찬물에 씻고 나일론 양말을 벗어 걸어두고 간신히 몸만 뉘일 작은 방구석에 포개어 잠을 청했다. 잠은 집에서 땔감 서너 짐 해 오는 날보다 잘 온다. 백리 길을 걸었으니 오죽 피곤하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시작한 첫날. "복조리 사싰쇼"라는 말이 자꾸 기어들어간다. 여기에 순진한 시골 땔나무꾼 촌놈들이 광주라는 곳을 처음 밟아본 터라 이쁜 새악시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을 들고 다니기도 쪽팔린다. 복조리 짐을 가득 지고 있기에 망정이지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 모양새가 툭 눌러 쓴 잿빛 빵모자 탓에 괴뢰군이 따로 없다.

우산동에서 시작하여 풍향동, 산수동, 동명동을 거쳐 학동을 돌아 남광주역에 다다랐다. 짐을 역 부근 병무청 가까운 국밥집에 맡겨두고 도청 근처를 마저 돌았다. 딱 이틀 팔고나니 이제 광주에선 마땅한 자리가 없던 터라 조리를 지게에 진 채로 열차를 타고 송정리를 지나 나주 영산포를 돌기로 했다. 이 쪽 인심도 괜찮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a 복조리를 줄에 꿰어  이쁘게 쌓아 둔 모양

복조리를 줄에 꿰어 이쁘게 쌓아 둔 모양 ⓒ 김규환

영산포에는 마침 설 대목장이 열리고 있다. 그렇다고 대목장에 가봐야 복조리 장사는 별 볼 일 없었다. 동네로 들어가야 하나라도 팔 수 있어 국밥 한 그릇 씩 둘둘 말아먹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나주 일대는 오래된 곳이어서 그런지 넓고 기와집이 많다. 벌써 기가 죽는다. 전쟁 때 몇 번이고 불에 타버린 고향 초가집하곤 비교가 안된다.

"복조리 샀쇼!"
"복조리 팔아요!"

어제 그제 해봤던 가락이 있어 대문 근처에서 목소리가 제법 우렁차게 나온다.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멍멍멍, 컹컹컹" 짖는 개다. 지게를 지고 있어도 일단 안심이 되는 건 한 손에 작대기가 들려 있기 때문이다.

곧 주인이 나와
"누구다요?"
"예, 거시기 복조리 좀 사싯쇼..."
"얼마간디요?"
"한 쌍에 200환이구만이라우"
"근디 어디서 오셨다요?"
"저기 담양 지나 화순 백아산 꼴짜기서 왔당께요."
"거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멀리서 오셨구만이라우. 하여튼 수고가 많구만요. 쬐깨만 기다맀쇼."

이런 사람이 많던 때라 대문 앞에서 사람을 만나면 오지게 좋았다. 사는 사람은 한 쌍만 사가지 않았다. 집집마다 일년 것을 한꺼번에 사야 내내 걱정 않고 살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보통 서너 쌍은 산다. 이 때 아니면 조리를 살 수도 없다.

이력이 붙은 복조리 장사는 주인이 없는 집 앞에 이르러서는 조리 한 쌍을 대문 안에 살짝 걸어 두고는 장부에 기입을 하고 급히 다음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런 집은 내일 아침 밥 먹기 전에 한 번 들르면 군말 않고 복조리를 값을 내줬다.

차츰 전대(錢臺) 배가 불러 오고 가져온 조리의 절반 이상이 기울더니 길가던 사람 몇이 어울려 사고 나니 이제 1/4 밖에 남지 않았다. 몸은 고됐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이 좋았다. 이렇게 팔리면 고생고생하여 목포까지 갈 필요도 없다.

거의 다 팔린 오후 2시 넘어서 다시 영산포에 모이기로 한 동네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타난다. 한 사람은 세 저리, 또 한 사람은 다섯 저리, 나머지 두 사람은 여섯, 일곱 저리씩 남겨 왔다. 그 중 나이 젤 많은 아저씨가 제안을 한다.

a 50개를 한 저리라 합니다. 25 쌍이 되지요.

50개를 한 저리라 합니다. 25 쌍이 되지요. ⓒ 김규환

"그래도 이왕 나온 김에 다 털어버리고 가야지 않겠냐?"
"그럼 목포까장 가자구라우?"
"별수 없제."
"아까 오면서 보니께 목포로 갈 세발 자동차 한 대가 있더라. 한 번 말해보마!"

목포까지 가는 길은 덜커덩덜커덩 말이 아니다. 짐과 같이 실린 네 사람은 찬바람을 먹고 얼굴이 꽁꽁 얼어 붙었다. 섣달 그믐 하루 전날 삼학동 주위를 구역을 나눠 돌고 있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도합 두 저리 남기고 다 팔아 치웠다. 몇 집 아침에 일어나 수금만 하면 이번 4박 5일 간의 장사는 성공리에 마칠 수 있다.

마지막 날이라며 목포에 온 김에 선착장에 들러 세발낙지 두어 마리씩에 삼학(三鶴) 소주 몇 잔을 걸쳤다. 여기가 두 번째라는 큰 형님은 통째 젓가락에 둘둘 마는가 싶더니 몇 번 씹지도 않고 넘겨 버린다. 돌아오는 길에 조기 한 두릅씩 사고 가벼운 맘으로 집으로 향했다.

온 가족이 모여 설을 보내며 각자 집에서 조리 팔던 자랑을 늘어놓느라 밤 깊은 줄 몰랐다. 설쇠고 서울로 나갈 계획을 미리 해 보이기도 한다.

한편 일단의 사람들은 '사람 많이 사는 동네 서울로 가야 한다'며 이미 서울로 떠났단다. 담양장에 모인 조리는 여러 죽세공품(竹細工品)과 함께 실려 전라북도를 거쳐 대전, 천안, 수원을 찍고 서울로 도착한다. 이 창에 간신히 삯을 주고 몸까지 실은 사람이 세 사람이란다. 차에 실은 조리도 한 사람 당 100저리 가량이 된다 하였다. 정월 대보름 날 까지 아예 서울서 살 작정을 하고 떠난 것이다.

이제 복조리 장사는 대부분 사라졌다. 연세가 많아 자연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허다하고 복조리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쌀을 일 필요도 없이 좋은 세상이 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어른들로부터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몇 해 전 신촌 로터리에서 복조리 파는 사람을 만난 뒤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관련
기사
- 복조리 한 번 만들어 볼까요

덧붙이는 글 |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 말씀을 듣고 쓴 글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 말씀을 듣고 쓴 글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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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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