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기다려지는 건 '제삿밥' 때문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3> 진짜 제삿밥과 잡탕

등록 2003.01.22 09:04수정 2003.01.2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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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 ⓒ 김규환

경북 안동지방에는 제사 음식으로 밥을 비벼먹는 풍습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제삿밥, 나아가 '헛제삿밥'이라 한다.


제삿밥은 비단 이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남북 산골에서도 마찬가지다. 시향(時享, 시제) 지낼 때 따라가보면 비슷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지역의 공통점은 야산이 많아 나물은 풍부한데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어물이 풍족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양쪽 공히 2-30km 반경에 드는 지역의 음식문화의 뿌리를 보면 차려진 재료나 준비과정도 비슷하다.

고사리, 시금치, 진저리콩나물, 무채, 가지, 토란, 도라지 등 산과 밭에서 구하기 쉬우면서도 빠트리지 않고 올리는 나물반찬을 고루 넣고 밥을 한데 섞어 둘둘 비벼 먹는 것이 이른바 제삿밥이다. 또한 안동지역의 막탕과 비슷한 잡탕이 준비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로 안동지역의 제삿밥은 전주비빔밥과 함께 궁중에서 '골동반(骨董飯)'이라 불렸던 비빔밥의 효시 중 하나로 자웅을 겨루고 있다.

평소 이 같은 푸짐한 제삿밥을 먹지 못하므로 제사 음식과 같은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단지 실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해서 '헛제사밥'이라 부를 뿐이다. 헛제사밥에는 각종 나물이 곁들여진 산나물과 어물과 육류를 싸리나무나 대꼬챙이에 꽂아 만든 산적이 곁들여진다. 소금간을 해 살짝 맛이 간 듯한 고등어가 젯상에 올려진다는 것과 끓이지 않고 무와 고춧가루가 들어간 자연발효 식품, 여타 지역과 상이한 매콤하고 알싸한 식혜가 나오는 게 다를 뿐이다.

a 차려진 나물 종류별로 다 넣으세요

차려진 나물 종류별로 다 넣으세요 ⓒ 김규환

제사 지내다 나라를 거덜냈던 조선시대! 조상을 섬기고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해나가는 것까지는 미풍양속으로서 마땅히 보전되어야 할 일이다. 어김없이 이러한 제례가 끝나면 사람들은 제상에 올랐던 음식을 먹으며 복을 빌고 정을 다졌다.


좋은 재료만 구해 정성을 다해 조상 앞에 올린 것이니 음식 맛이야 비교할 수 없다. '제사밥 한 번 잘 먹으려고 3년을 굶으랴?'라는 속담도 있을 지경이니 우리 민족에게 제사가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어린 시절, 이 같은 제사 음식이 먹고 싶어서 제사가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려진 일이 있다. 할머니, 어머니의 수고로움은 뒷전이고 제사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1년에 서른 번 넘게 제사를 지냈으니 어른들은 농사일에 제가가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런 중에 제사가 없을 때도 제사 음식처럼 먹고 싶은 식욕 때문에 생겨난 것이 '헛제삿밥'이라니!


늦은 제사를 올리고 나서 음복을 겸해 허기를 달래려고 상에 올랐던 각종 나물 등을 비벼 먹었을 때의 그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었음직하다. 본격 상품화된 것은 1978년 무렵이라고 한다.

안동지역은 태백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교적 산악이 많고 평야가 적어 농업 조건은 좋지 않다. 밭농사가 주로 발달했으며 바다와 떨어져 있어 교통이 발달되기 전까지 어류는 자반으로 반입됐으며 생선이 귀했다. 요컨대 지리산 청학동은 변해도 이곳 안동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리적, 역사적 전통이 확고한 지역이다.

이같은 지리·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이 지역 음식은 내가 먹어보기로 채식이 많고 양념이 맵고 짜다. 음식이 투박하면서도 깔끔한 맛, 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특히 제사 음식은 고추장과 마늘 등 양념이 들어가지 않아 구수하고 담백하다.

헛제삿밥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제사에 사용되는 3색 나물 한 대접과 전(煎)과 적(炙)이 한데 담겨져 나온다. 산적에 간고등어와 상어가 들어가는 것이 특이하다. 또 탕(湯)과 깨소금 간장 종지와 밥 한 그릇이 나온다. 탕은 어탕(魚湯), 육탕(肉湯), 채탕(菜湯)에 이들 세가지를 섞어 끓인 막탕이 있다. 산해진미를 한데 모아 끓였다고 보아도 된다.

a 원래는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지 않아야 된답니다. 정 아쉬우면 김치 좀 넣으세요.

원래는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지 않아야 된답니다. 정 아쉬우면 김치 좀 넣으세요. ⓒ 김규환

헛제삿밥을 먹을 때는 나물에 고추장을 일절 넣지 않고 깨소금 간장으로 간을 해 비벼 먹는 게 원칙이다. 전주비빔밥이든, 헛제사밥이든 음식이 현대적인 퓨전 음식으로 변화하면서 고추장 넣고 계란 후라이까지 넣어 먹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음식의 본질과 전통을 앗아가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침 오늘 아침이 큰 아이 두 돌이다. 몇 가지 나물에 잡채와 생선 세 마리 구워 생일상을 차렸다.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잡채에 간장을 넣고 비벼봤다. 약간 싱거운 느낌이 있어 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헛제삿밥' 맛이 난다. 딸 덕에 헛제삿밥 흉내를 내보다니.

이번 설에는 제삿밥깨나 먹을 분위기다. 고루 갖춰진 반찬을 듬뿍 넣고 밥은 반 공기만 넣어 나물밥을 먹으면 크게 다르지 않다. 잡탕은 나물에 찐 조기, 병어, 전어, 준어를 조금 떼어 넣고,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삶은 것을 조금 잘라 넣어 김치와 탕국을 한 그릇 부어 끓이면 끼니마다 찾게 되는 대단한 요리로 둔갑한다. 남자들이 하면 더 맛있다고 하니 올해도 내가 할 작정이다.

곧 설이 다가온다. 설날은 하루지만 설은 정월 대보름까지를 이른다고 하니 남은 음식 귀찮다 생각하지 말고 요긴하게 활용하자.

a 딸 아이 생일날 아침에 상이 차려졌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차리느라 수고한 아내는 밥 먹고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딸 아이 생일날 아침에 상이 차려졌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차리느라 수고한 아내는 밥 먹고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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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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