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았어요

청소년 축제에서 만난 아이, 은화

등록 2003.02.05 00:41수정 2003.02.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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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은화예요. 잘 지내시죠?

언제나 활기찬 웃음으로 감기 바이러스를 다 죽이고 계시겠지요?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도 선생님을 많이 뵙지 못했습니다. 항상 분주하신 모습으로 학교 내를 오가시는 모습밖에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면 어딘가를 바삐 가시다가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손을 들어 보이시며 "어 그래, 은화 안녕!" 하시며 저를 향해 웃어주실 때는 인사하는 저도 그만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2002년 한 해는 누구보다 보람차고 자랑스럽게 보낸 한 해로 기억이 될 것 같아요.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그리고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순천 청소년 축제. 저는 솔직히 스포츠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을 때까지도 그런 대회가 있겠거니 했었어요.

월드컵이 시작되고 중순쯤 되어 순천 청소년 축제의 남해연합수련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소중한 수련회였어요. 하지만 인문계 학생들이 대다수여서 어렵게 실업계 학생임을 밝히고 어색한 분위기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한 탓에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진 못했습니다.

아쉽게만 보냈던 수련회의 여운도 잠시 잊은 채 뒤늦게 월드컵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샌 줄 모른다는 속담이 저한테 어울릴 거예요. 대한민국이란 조그마한 나라가 4강까지 올랐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한 때 우리 나라가 싫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의 어린 중학생 미선이와 효순이가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도 아무런 대응도 못하는 작고 힘없는 나라. 과거에는 36년 동안이나 일본의 통치하에서 민족의 얼과 주권을 빼앗기고 고통받았던 우리 선조들. 이런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있는 나라. 그런데 우리가 해낸 것입니다.

비록 축구시합에서 4강 신화를 이룬 것이지만 월드컵은 축구만의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붉은 악마의 물결을 이루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나라의 국민답게 민족의 얼이 담긴 민요와 함께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알고, 철없게만 생각했던 청소년들도 애국심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즐거워하고 때론 가슴 벅찬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예의와 질서를 갖춰 응원단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월드컵에서 보여줬던 단결심을 우리는 한번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미선이와 효순이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당당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단결심과 따뜻한 관심만이 어린 두 영혼을 편안한 길로 안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월드컵 말고도 또 한 가지 자랑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준 청소년축제입니다. 미래의 주역인 저희들이 나름대로 미래를 설계도 해보고 공동체의식을 함께 나누면서 학교 수업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공부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천에서 보름이 넘게 벽화 그리기를 했던 추억은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보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침 등교 길에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셔터를 누르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저도 보게 되었습니다. 학교 건물이 보였고, 저 멀리 산 위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보였고 해가 보였습니다. 저는 아무리 쳐다봐도 무엇을 보시며 어디를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시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특별한 것을 찾고 계시지 않을까? 그래서 지나가는 일분일초가 모두 특별하도록 만드시는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가슴속으로 말했습니다. 제 마음속의 선생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멋쟁이 선생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에게 주어진 일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작은 발견이었지만 이제껏 알지 못해 헤매었던 제 마음속의 방황이 멈춘 듯 합니다.

온 국민은 2002년 월드컵을 잊지 못하겠지만 저는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준 청소년축제를 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에 정열과 열정을 담뿍 담을 수 있도록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선생님, 방학 잘 보내세요. 건강은 필수입니다.


사랑하는 은화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어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구나. 눈이 귀한 이곳 남도에서는 너무도 반가운 손님이지만 오늘 아침 정작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너에게서 온 긴 편지였단다. 지금은 모든 것이 편리해졌지만 과거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은밀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편지밖에는 없었지.

그 편지가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다시 답장을 받게 되기까지는 빨리 잡아도 닷새 이상은 기다려야 했단다.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얼마나 애절했던지! 하지만 나를 키운 것은 바로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구나.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이면 초등학교 시절이 문득 그리워지곤 한단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전라북도 장수라는 산골 마을에서 이태 동안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지.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세수를 하고 나면 머리에 고드름이 생기고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었으니까. 모두들 가난한 시절이어서 옷도 춥게 입고 찬바람이 문틈으로 솔솔 들어오는 추운 방에서 겨울을 보내곤 했었지.

그래도 하루 종일 하얀 솜털 같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겨울이 싫지는 않았단다.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지. 꽁꽁 얼어붙은 논에서 동무들과 썰매를 타다가 엉덩방아를 찧던 기억도 삼삼하구나. 우리의 삶에는 그런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을 그 무렵에 이미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손을 호호 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벌판에서 연을 날리고 돌아와 양지바른 곳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참 신기했던 것은 겨울이 지나면 꼭 봄이 오고 만다는 거야. 한참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는 정말 봄이 와 줄 것 같지가 않았거든.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봄은 환희 그 자체였는데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자연은 결코 실망을 주는 법이 없었지.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였단다.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접고 참고 기다리다보면 어김없이 새파란 희망의 싹을 보이곤 했으니까.

너의 편지를 읽다보니 지난 해 뜨거웠던 유월의 함성이 다시 들리는 것 같구나. 처음 우리의 목표는 16강이었지. 목표를 초과 달성하여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어냈지만 나는 16강이란 그 말이 참 듣기에 좋았단다. 1등이 아니라 16등인데도 국민의 숙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그래서 사실은 16강이 8강이 되고 8강이 4강이 되면서 조금은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단다. 그런 생각도 승리의 기쁨에 곧 묻히고 말았지만.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어린 중학생인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지. 천하보다도 귀한 두 생명의 죽음을 애도하고 가해자인 미국의 오만함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우린 그때 너무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것이 스포츠의 함정이기도 하단다.

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며 두 소녀가 미군들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한 작고 힘없는 나라가 싫었다고 말하고 있구나. 36년간 일본에게 민족의 얼과 주권을 빼앗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도 들추어내면서. 그리고 이제라도 우리의 당당함을 보여 주어야한다고.

그 당당함은 다름 아닌 주권국가로서의 자존감을 뜻하는 것이겠지? 월드컵이 끝나자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의 거리를 들불처럼 수놓았던 수백만 개의 추모 촛불의 의미도 결국 주권국민으로서의 자존감을 위한 최소한의 몸짓으로 해석하고 싶구나. 내 나라에서 죄를 범한 사람을 수사하고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진정한 주권국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거야. 그런 부당한 소파협정을 개정함으로써 어린 두 소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의 기특하고 갸륵한 마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단다.

다만, 두 소녀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소파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한 순간의 감정의 분출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미래의 주역인 우리 청소년들이 건전한 사회의식을 갖고 당당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해주었으면 해. 건강한 의식을 가진 국민들이 많아지면 국가의 자존은 저절로 세워지는 법이니까. 나라의 백년대계인 교육이 바로 서야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단다.

교육의 지향은 결국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의 출세와 욕망만을 좇는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자존이 무엇인지 알고 이웃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 비록 부끄러운 과거를 지닌 나라지만 나를 낳아주신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듯이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오로지 일류대를 목표로 죽은 지식을 암기하도록 강요하는 지금의 입시교육으로는 어렵겠지. 그런 원대하고 고상한 꿈을 이룬다는 것이. 그래도 너는 청소년 축제를 통해서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았다니 무엇보다도 반갑구나.

며칠 전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마음이 울컥했단다. 화면에는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소녀아이가 보였는데 학원을 다섯 군데나 다닌다고 하더구나. 그날도 눈이 왔었는데 학원 때문에 동무들과 함께 놀 시간이 없다고 말을 하는 아이의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그 아이의 부모를 만나면 한 번 따져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단다.

그 아이의 부모는 경쟁사회인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지 모르지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어린 나이에 하루종일 학원을 헤매고 다니지 않으면 정말 낙오자가 될까? 부모의 잘못된 교육열로 인해 공부가 싫어지고 세상이 싫어지다 보면 오히려 그 아이가 더 불행해지지는 않을까?

이 세상에 자식의 불행을 바라는 부모는 없겠지만 해마다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부모 때문에 불행해진 자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기다림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구나. 빨리 심고 빨리 거두려는 조급한 마음이 언제나 일을 그르치고 말거든. 그것은 우리 국민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지.

다행히도 나는 기다림의 지혜를 자연에게서 배웠단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농부지만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금은 비록 자기 생각이 부족하고 판단력이 약한 아이라도 신뢰와 사랑의 거름을 주다보면 반드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만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방학이 끝나면 네가 피워 올린 꽃을 어서 보고 싶구나. 이제 방학중 특기적성교육도 끝났으니 남은 방학 동안 책과 자연을 가까이 하거라. 짧은 즐거움만 좇지 말고 오랜 기다림 뒤에 얻어지는 봄의 환희가 너의 것이 되기를! 그리고 늘 행복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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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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