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복도에서 설을 지내는 선생님들

전남도교육청, 고입선발고사 기습적으로 처리

등록 2003.01.31 14:24수정 2003.02.0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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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입 선발고사를 일방적으로 강행하려는 도교육청의 독선적인 행정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중인 박 선생님으로부터 온 전화였습니다. 집안의 장남인 그는 설을 세러가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떼어 농성장을 빠져 나와 제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오늘 소식 알고 계십니까?"
"예. 홈페이지에서 봤습니다."
"설이 지나면 발표하겠다고 해놓고 오늘 기습적으로 처리해버렸습니다."
"그랬더군요. 설날 차례도 합동으로 지내기로 하셨다면서요?"
"예. 그런데 저는 장남이라 어쩔 수 없이…"

박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농성 대오를 빠져 나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농성 3일째 되는 날 굳게 닫힌 도교육청 철문을 사이에 두고 전남 각지에서 올라오신 170여명의 교사들과 함께 전남교사결의대회를 가진 뒤 다시 돌아오는 발길이 차마 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설을 하루 앞두고 고향 생각에 젖어 따뜻한 안방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녘 아내 몰래 거실로 나왔습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세러 가지 못하고 엄동설한의 차디찬 냉기가 흐르는 전남교육청 복도에서 새우잠을 자고 계실 전남지부 김목 지부장님을 비롯한 집행부 선생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입니다.

고입선발고사가 부활되면 중학교의 교육과정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점수로 반영되지 않는 창의력과 도덕성 함양과 같은 덕목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국어시간에 토론이나 연극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과학시간에도 현미경 대신 문제집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수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마련한 각종 첨단 기자재들은 먼지에 쌓이고 말 것입니다. 중학교도 밤 11시까지 불법보충자율학습이 강행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파하면 입시 학원으로 달려가 아이들은 꿈속에서도 공부의 노예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체능과목도 입시과목이 되다보면 음악실에서도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미술 시간에도 그림 대신 이론 수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전인교육은 말장난이 되고 학교는 더 이상 즐거운 곳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은 차츰 빛을 잃게 되고 입가에 해맑은 웃음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얼마 전 순천에서 평준화 시행여부를 둘러싸고 여론조사에 앞서 찬반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이유로 평준화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반대편의 의견도 경청해보고 싶었습니다. 평준화를 반대하는 진영에서 나온 전직 교장이셨던 한 분은 여론조사 자체를 마땅치 않게 여긴다고 전제한 뒤에 어린 조카가 있는데 학원을 다섯 군데나 다닌다는 말을 먼저 했습니다.

저는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런 말은 평준화를 지지하는 쪽에서 해야 어울리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입시과열로 인해 학교의 정상 교육과정이 왜곡되고 지나친 경쟁이나 과도한 학습으로 인해 아이들의 성장을 헤친다는 것이 평준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한 표현을 쓰자면 충격이 좀 컸습니다.


"어린아이들조차 학원을 다섯 군데나 다니는 이런 경쟁시대에 평준화라니요?"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학원을 다섯 군데나 다녀야 하는 반인간적인 시대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린 조카에 대한 연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잘못된 것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현실론을 주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잘못된 교육이 지속되어야한다는 의견인 것은 분명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분의 마음속에 '아이들'이 존재할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여론조사에서 평준화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뉴스에는 평준화를 반대하는 진영에서 한 분이 나와서 여론조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듣는 순간 아득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성 판단능력이 없는 학생들을 조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학생들이 이성판단능력이 없다니, 그렇다면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는 셈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죽은 지식을 암기하는 것만을 강요하는 시험위주의 교육이 아이들의 이성판단능력을 흐리게 한 주범이 아닌가?'

물론 저는 학생들이 이성판단능력이 없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성판단능력은 지식의 양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의 판단능력이 미숙하다고 해도 올곧은 정신이 있는 아이라면 교육철학이 빈곤한 일부 교육관료들보다는 더 훌륭한 생각을 해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시험성적의 노예가 된 건강하지 못한 모범생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평준화를 반대해온 사람들은 여론조사를 통해 시민들의 평준화 열망이 압도적인 지지로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교평준화가 기정사실화되어 교육인적자원부에 건의된 현실적 상황에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의사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메일을 열어보니 박 선생님은 장문의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설을 세러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저는 아내에게 두 시간만 저를 찾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더딘 글 솜씨로 글이 잘 될까, 그분들의 진실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저는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고질이 된 허리디스크를 걱정하는 아내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박 선생님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싸우고 돌아왔습니다. 이기지 못했습니다. 고입선발고사 공문이 일반계 고등학교에 발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고 있습니다.(…) 김목 지부장과 김영효 수석부지부장을 도교육청 콘크리트 바닥에 남겨두고 돌아왔습니다. 몇 분의 지부 집행부와 지회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귀가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주변에는 전교조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물론 오해가 아니라 전교조나 전교조 회원의 잘못을 제대로 짚어서 충고해주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오랜 세월 전교조의 강령을 사랑하고 전교조 선생님들과 뜻을 같이 해온 사람으로서 겸허한 마음으로 그분의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충고가 전교조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경우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전남교육청 차디찬 복도에서 농성중인 선생님들은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인데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추위에 떨면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투쟁경력이 깊어질수록 승진 등의 세속적인 이익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들의 오해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촌지 거부투쟁을 벌였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희생과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싸움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과 해맑은 웃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적어도 제가 만난 전교조 활동가 선생님들의 심성은 그렇습니다. 전교조는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아이들의 성적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교사가 아이들의 영혼을 사랑하면 성적은 아이들이 스스로 챙깁니다. 시험이나 성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박 선생님은 도교육청에서 농성중인 선생님들께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해오셨습니다. 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을 지키기 위해서 도교육청에서 농성중인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분들의 숭고한 투쟁으로 인해 교육이 바로 설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아이들에게 신명나는 즐거운 학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아이들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 올립니다. 농성중이신 김목 지부장님을 비롯한 전남지부 집행부 선생님들도 함께 받아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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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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