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싸움도 있다

천상의 꽃, 혹은 가짜에 대하여

등록 2003.02.13 05:56수정 2003.02.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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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광주적십자 수련원 식당에서

광주적십자 수련원 식당에서 ⓒ 안준철

광주 적십자 수련원 식당
두 개의 큰 기둥에는
천장 가까이 포도나무 넝쿨이
그린 듯이 매달려 있었다.

그 위용이 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 같기도 하고
모세의 지팡이를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 같기도 했다.

기둥 아래쪽에는
잎새가 달려있지 않았고
맨 기둥을 움켜쥔 갈퀴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밥을 먹다 말고
천장 쪽으로 목을 꺾은 채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옆자리에 앉은
김 선생에게 물었다.

"저 이파리들은 어디서 수분을 공급받을까요?"
"조화 아닌가요?"

천상의 꽃을 바라보다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졸시, '천상의 꽃'



정 선생님!

시를 탈고했습니다. 시 같지도 않지요? 흔히들 자신의 시를 인용하면서 겸손을 떠느라고 제목 앞에다 '졸시'라는 말을 붙이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네요. 그냥 풀어서 산문으로 써버릴까 했지만 그날 식당에서 제게 온 필(feel)이 너무도 시적이어서 몇 번 행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고 하다가 끝내는 이렇게 시를 모욕시키고 맙니다.

그런데 왜 조화라는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때 맥이 탁 풀리면서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이 때로는 편리하기도 하겠구나. 아무런 고민도 어려움도 없이 저리도 높아질 수가 있겠구나. 생명이 없으니 결핍감도 없고 아픔도 없겠구나. 시들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니 초록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싸울 필요도 없겠구나. 싸움이 없는 삶이란 저런 가짜의 아름다움일 수 있겠구나.


저는 찬찬히 플라스틱으로 만든 넝쿨이파리들은 올려다보았습니다. 그것은 초록으로 보이지만 진정한 초록이 아닌, 광합성의 능력이 없는 모조품들이었습니다. 햇빛과 바람을 즐길 줄 모르는 감각 없는 무생물이었습니다.

자신의 반짝임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누구와도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불구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런 모습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지요. 선생님도 그런 마음으로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맨 것이겠지요.

a 고입선발고사 철폐농성 중에 만난 여수중등지회장 정춘화 선생님

고입선발고사 철폐농성 중에 만난 여수중등지회장 정춘화 선생님 ⓒ 안준철

생각납니다. 굳게 닫힌 전남교육청 정문 너머에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서 계시던 그 전투적인 선생님의 모습이. 전남지부 최초의 여성지회장이 되시어 여수중등지회를 진두지휘하는 그 모습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라는 셰익스피어의 한 극중 대사를 무색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긴 머리의 여성조합원이라서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요? 선생님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아름다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정 선생님!
어제는 학교에서 졸업식을 했습니다. 한 해 동안 정들었던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쉽지가 않았는데 아이들은 그런 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서 끝내주기만을 바라는 표정이어서 마음에 작은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짠한 마음이 들었는지 마지막 당부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가게 될 제자들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무한 경쟁사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서운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이 말에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쟁을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미진하고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늘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사회에 나가면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쟁하며 사는 것이 '네거티브' 정신이라면, 사랑하며 사는 것은 '포지티브' 정신입니다. 경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에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과도한 경쟁을 하다보면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남과 경쟁하는 이유도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경쟁해서 불행해진다면 그것은 참 바보 같은 짓입니다.

사랑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다보면 경쟁하는 것보다 더 뜨거운 싸움을 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싸움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기 위한 이기적인 싸움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바로 서기 위한 싸움입니다. 남을 배려하기 위한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사람은 경쟁력이 강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했고, 그 작고 부족한 사랑만으로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정 선생님!
어린 영혼들에게조차 남을 짓밟고 오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오로지 경쟁만을 부추기는 입시교육에 대한 싸움은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교육은 고급상품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외치는 교육관료들과의 싸움은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아이들을 생명이 없는 플라스틱 모조품으로 만드는 병든 교육제도와의 싸움은 아름다운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사랑의 무기를 들고서 말입니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 보며.

-김남주 시인의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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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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