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가족에겐 이민이 최선인가

실망한 아내에게 30년만 더 기다려주길 바라며

등록 2003.02.01 23:18수정 2003.02.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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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정말 이민을 가든지 결단을 내리자. 싸움이나 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는 정당들에게 수백억원의 선거자금을 그냥 주면서, 십수억원의 교육예산이 없다고 장애아동 교육을 방치하는 나라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해?"

지난해말 대통령 선거 기간에 보수 대정당들에게 100억원대의 국고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방송을 듣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꺼낸 말이었다. 작년말 대선 자금을 위해 받은 국고에서 받은 보조금이 집권 여당이 100억원, 보수 야당이 130억원 정도였고, 진보정당이 몇 억원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내가 분노한 것은 제 역할을 못하는 기성 정치 정당들에 대한 실망감 이전에 장애아동 교육권에 대해 국회가 예산이나 법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도외시하고 있다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러 부모단체들과 함께 장애아동 통합교육을 제대로 하도록 특수교육 유급보조원 재원으로 18억원의 최소 예산을 마련해달라고 국회 등에 청원운동을 전개했었는데, 결과는 허사였다.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해 입안되었던 예산은 예결산위원회에서 전부 깍였고 다른 특수교육 예산 증액도 심의과정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아내는 이에 크게 실망했었고 정치권에 국민의 혈세가 수백억원씩 들어갔다는 소리에 허탈해 하고 박탈감을 느낄 만했다.

나는 '우리 나라를 놔두고 왜 이민을 가느냐'는 무심코 가져온 생각 때문이었는지, 이민을 생각해보자는 아내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민 무용론자로서의 소신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대답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 마디로 할 말이 없었으며, 아내의 분노섞인 넋두리에 엄연한 까닭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법 오래 진보정당 운동에 관여해온 나는 지난 십여년 동안 우리나라 여야 국회의원이 소속된 보수 정당들이 받은 국고가 수천억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한 해 동안에만 천억원이 넘는 국고가 기성 정당들에게 배분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장애아동의 교육권이나 기본인권은 아직도 예산에 밀려 뒷전에 밀려 있는 게 엄연한 우리나라 현실이다.

아내의 분노 섞인 푸념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왜 이민을 가려고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간간이 이민을 간 부모들과 이민을 가서 돌아오기가 두렵다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역시 우리 사회에서 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는 누구나 '아이보다 단 하루만 더 살고 싶은' 동병상련 처지일 수밖에 없는가 되묻곤 한다.


그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해외 이민을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장애인 인권이 언제나 예산에 밀려 구제불능이라면 마땅히 이민을 가는 것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예산이 확보되어야 기본인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진 관료들과 입법 책임자들을 볼때마다 정말 이 나라가 싫어지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제도에 눈을 돌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법제도 개선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이민을 선택해야 맞을 것이다. 자녀의 장애 문제로 많은 고민 끝에 이민을 선택한 부모들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을 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외에서 장애인 자녀를 키우다가 귀국하기를 두려워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아동을 키우는 가족으로서 혼자가 아니다. 다른 많은 장애 어린이들과 성인 장애인들이 살고 있고 더구나 가족이 없는 장애아들도 많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의 가족이기에 개인적인 선택보다는 사회적인 선택을 옹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어렵더라도 30년만 더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그것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30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라도 참고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아내의 대답은 역시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아내에게 이민이라는 선택을 30년 동안 미루자고 제안했지만 확실한 약속이 될 수는 없다. 다만 30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고 싸운다면 사회적 약자들도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다짐을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30년 세월이 어떤 확실한 것도 대답해주지 못하지만, 벌써 나타나고 있는 희망은 보여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신을 분노하게 만든 그 돈에는 낡은 세계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정치 집단들이 받은 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 정당이 받은 적지만 값진 돈도 있다. 그것은 우리 아이 같은 장애인, 사회적 약자들이 살만한 세계를 보여주는 희망이기에 더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라고...

우리 부부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무상교육 등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분명히 한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 그리고 진보 정당이 장애인 기본권의 제도화를 제대로 정책화하고 열심히 실천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 아내는 박탈감을 극복하고, 서로 다짐한 3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장애인 부모운동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다. 장애 어린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몸으로 절절히 느껴온 우리 부부는 어쩌면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른다고 꿈꾼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동지여 힘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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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부모연대 <함께웃는날> 편집위원 장애인교육권연대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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