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39

슬픈 옛 이야기(4)

등록 2003.02.05 11:28수정 2003.02.0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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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들은 그는 즉시 만사 제쳐놓고 장강을 건넜다. 그리고 천의장을 찾았지만 외출하고 없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약재를 채취하러 갔다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북의가 자신을 만나지 않으려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곤륜산을 떠나기 전에 월궁옥녀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은 그는 사형의 마음을 이해하고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의장에서 백 년을 머물러도 결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남에는 치료를 애타게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일단 물러갔던 그는 다시 천의장을 찾았다.

이번엔 소문나지 않게 주의한다고 하였지만 남의가 장강을 건넜다는 소문은 즉각 퍼져나갔다. 하여 매번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곤륜산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월궁옥녀가 죽었으며 그녀가 죽은 직후 곤륜신의가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것이다. 허겁지겁 곤륜산으로 돌아간 그는 울고 있는 아들을 품에 안고 하산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사형이 탕약으로는 편풍을 고칠 수 없다며 물러섰을 때 그것도 못 고치느냐며 의기양양해 하는 대신 위로의 말을 던졌다면, 그리고 사형이 얼마나 월궁옥녀를 연모하였는지 뻔히 알면서 그의 앞에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또 하나 혼례를 올린 직후 마냥 행복하다는 모습을 보이면서 능력이 없는 자는 미인을 얻을 수 없다는 조롱의 말을 던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사형이 만나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그를 만날 수 없어 월궁옥녀가 죽었다는 생각이 든 호문경은 젊은 시절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통탄하며 눈물 흘린 것이다.


곤륜산의 양지바른 곳에 두 개의 봉분이 생긴 이후 그곳은 인적이 끊겼다. 이후 남의는 장강을 넘지 않았다. 이젠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남의의 아들이 장가를 갔다. 그때 그에게는 세 명의 첩이 있을 때였다. 오랜 동안 단 두 식구만이 살아온 것이 너무도 적적하여 많은 자손을 얻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남의의 자부(子婦: 며느리)가 된 여인들 모두 그에 의하여 구사일생한 환자들의 후손이었기에 모든 것이 양해되었던 것이다. 이후 남의가 머물던 의성장(醫聖莊)은 곧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적적하게 지내던 남의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이를 안고 필사의 도주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은 하나의 핏빛 배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명기되지 않은 배첩에는 자신들이 행하고자 하는 일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지 않으면 크나큰 재앙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 쓰여있었다.

그러면서 만사를 제쳐놓고 즉각 서천목산(西天目山)으로 오라고 쓰여있었다. 배첩의 맨 아래에는 두 자루 도(刀)가 교차한 그림이 있었을 뿐이다.

그림을 잘못 그려서 그런지 하나는 반쯤 휘어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보통의 도보다 도신(刀身)이 좁게 그려져 있었다. 무림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남의는 그것이 어느 문파의 표식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림의 일에 휩쓸리기 싫었던 그는 배첩의 내용을 무시하였다.

며칠 후, 다시 같은 내용의 배첩이 배달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것을 무시하였다. 다시 며칠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밤, 의성장의 담장을 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흑의를 걸친 그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어 신분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의성장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눈에 뜨이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각, 남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손녀를 치료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소에 있었다. 갑작스런 고열과 기침으로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었지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시침(施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단말마 비명소리에 놀라 밖을 내다 본 그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의복면인들에 의하여 의성장의 식솔들의 수급이 무차별적으로 베어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잠시 후 분기탱천하여 밖으로 향하려던 그는 주춤거렸다. 나가봤자 개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대신 황급히 침상 아래에 만들어 놓은 기관으로 숨어들었다.

의성장을 지을 때 공사를 총괄 지휘하던 도편수가 말하길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이런 것 하나쯤은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건의를 받아들였기에 있는 것이다. 지하에 마련된 그것은 교묘한 솜씨로 만들었기에 기관토목에 웬만한 안목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알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아무튼 기관으로 숨어 든 남의는 숨죽인 채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태의 추이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품에 안고 있던 손녀가 갑작스럽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소리를 들은 침입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며 수색을 시작하였다. 이에 남의는 황급히 지하 통로를 따라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피 말리는 필사의 도주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석 달 열흘을 도주한 끝에야 간신히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나마 물살 세기로 이름난 무산삼협 중 서릉협에서 목숨을 걸고 물 속으로 뛰어 들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거친 물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본 흉수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소문을 듣고 안 사실이지만 그날 의성장에 있던 모든 식솔들은 수급이 베어진 시신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생존자는 없으나 실종자는 둘이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남의 본인과 소녀였다. 남의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원수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두 자루 장검이 교차한 배첩을 보내왔다는 것뿐이었다. 이날 이후 남의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죽립(竹笠)을 쓴 채 중원 곳곳을 돌아 다녔다.

흉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하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원수의 정체를 알아내게 되고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흉수는 무림을 완전 장악한 무림천자성의 주구라 할 수 있는 유대문과 왜문이었기 때문이다. 반쯤 휘어진 도는 유대문의 상징이고, 도신이 얄팍한 도는 왜문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당시 두 문파는 무림천자성의 힘을 등에 업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가던 판이었다. 아무런 은원도 없건만 처참하다 할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그들을 없애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사형처럼 탕약에 일가견이 있다면 독극물로서 해를 입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침구술로는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이후 나날이 커져 가는 두 문파의 성세를 보면서 한숨만 내쉬던 남의는 손녀를 데리고 이곳 대흥안령산맥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많이 자생하는 천남성(天南星) 등 독초를 채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독(毒)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함이었다.

청산이 푸른 한 땔감 걱정은 하지 말라하고, 장부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다. 남의는 이곳에서 독에 대한 공부를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무공도 모르고 혈혈단신인 자신이 유대문과 왜문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그것 뿐이라 판단한 것이다.

독하면 운남성(雲南省)이나 남만(南蠻)을 생각하기 쉬운데 굳이 대흥안령산맥을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운남성과 남만은 사시사철 여름뿐인 곳이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얻은 독은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사시사철이 분명하기에 그런 제약이 없기 때문이었다.

흉수들이 왜 그런 해코지를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던 남의는 희미하게나마 그들이 자신의 의술을 악용하려 그랬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의원이었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저 산에서 약초를 캐는 심마니인 척하였던 것이다.

그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캔 약초를 가지고 저잣거리에 갔을 때 들은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의원들이 연속하여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아무튼 이럴 즈음 약초를 캐러 산으로 들어갔던 그는 독사에 물려 신음하는 장일정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숙! 의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오냐! 네게 의술을 가르쳐 주마. 일어서거라!"
"감사합니다, 사숙!"

모든 이야기를 들은 장일정은 남의가 너무도 쉽게 가르침을 내리겠다고 하자 환한 웃음을 지으면 일어섰다.

"노부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허나, 조건이 있다."
"예에? 조, 조건이라니요?"

"그래! 이 세상에서 유대문과 왜문을 말살시켜다오."
"……!"

장일정은 사숙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즉각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의원이란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는 살인을 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다. 유대문과 왜문을 말살하라고 하니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도 될 수 있는 인명을 앗아 달라는 것이다.

사부인 북의 역시 천의장을 박살낸 원수를 갚기 위하여 북명신단을 제련하는 중이다. 누가 원수인지 밝혀지기만 하면 그것을 복용하고 원수를 갚겠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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