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38

슬픈 옛 이야기(3)

등록 2003.02.04 14:23수정 2003.02.0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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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것을 호문경이 있는 자리에서 주었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전후 사정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문경이 없는 자리에서 그것을 주었기에 제대로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준 시점(時點) 때문이었다. 목재충이 곤륜산을 떠난 것은 호문경과 혼례를 올린 직후였다. 따라서 혼례를 올리기 전에 그것을 준 것이다.


여인이 사내에게 건넨 물건은 정을 준다는 의미를 지닌 정표가 된다. 따라서 목재충을 사랑하였으나 내기 때문에 호문경과 혼례를 올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월궁옥녀 옥란희는 결코 특별한 여인이 아니었다. 빼어난 미모를 지녔을 뿐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과 부친이 합작을 하여 호문경에게 유리한 문제를 내도록 하였다는 것을 지금껏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여인들이란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여심난측(女心難測)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마음은 누구도 추측하기 힘들며,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여심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혼례를 올리기 전부터 좋아하였다는 것을 낭군이 알게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잊어 버렸느냐?"


곤륜신의는 우물쭈물하는 여식을 보며 답답한 듯 채근하였다.

"그, 그게…"
"말해라! 잃어버렸느냐?"
"예…!"


월궁옥녀는 부친이 왜 그것을 찾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집요하게 물고늘어지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어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어디에서 잃어 버렸느냐? 응? 그걸 어디에서 잃어 버렸어? 그걸 찾아야 한다. 그게 있어야 네 병을 고칠 수 있어."
"장인어른! 대체 그게 뭔게 그러십니까?"

듣고만 있던 호문경은 장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정색하였다.

"이놈아, 그게 뭔지 알아? 그게 바로 생사잠이라는 것이야. 그 안에는 일각사왕의 뿔이…"

생사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은 호문경 안색은 환해졌다. 너무도 사랑하는 아내의 폐 속에서 생명을 갉아먹는 오사를 꺼낼 방법이 있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생사잠에는 만사지왕(萬蛇之王)이라는 일각사왕의 상징인 뿔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꺼내 미세한 가루로 만든 후 숨을 쉴 때 들이마시면 놀란 오사가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게되는 것이다.

"여보! 그걸 어디에서 잃어 버렸소? 잃어버린 곳만 가르쳐 주면 내가 가서 찾아오리다. 천길 벼랑에서 떨어트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니 어서 말해 주시오."
"그, 그게…"

살 방도가 있다는데 안도하면서도 옥란희는 여전히 이실직고할 수 없었다. 자칫 오해받을까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도 사랑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역시 여심이란 추측하기 힘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부친과 낭군의 너무도 집요한 채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삼 년이었다.

젖먹이였던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가 돼서야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호문경이 절대로 오해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쓴 결과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호문경은 즉각 곤륜산을 내려왔다. 물론 사형인 목재충을 찾기 위함이었다.

곤륜산은 중원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산이다. 서쪽으로 내려가면 서역으로 향하는 것이고 동쪽으로 향하면 중원으로 향한다. 호문경은 사형이 중원으로 향하였을 것이라 판단하고 중원행을 하였다.

아주 어렸을 때 곤륜산에 오른 후 몇 번 저잣거리를 다녀본 그로서는 너무도 신기한 것이 많은 세상이었다. 하여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동진(東進)하던 중 길을 잘못 들어 장강 이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음엔 서툰 세상살이와 고약한 인심 때문에 굶기를 밥먹듯 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마을을 지나다가 그 마을 최고 부자가 오십견(五十肩)이라는 고질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견배통(肩背痛)이라고 불리는 오십견이란 나이 오십 전후에 잘 걸리는 병으로 지독한 통증으로 어깨를 전혀 쓸 수 없게 하여 머리를 감거나 의복을 갈아입을 수조차 없게 하는 병이다.

대개는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아도 반년 정도가 지나면 저절로 치유되는데 그 부자는 오십견을 삼 년이나 앓고 있었다. 이 정도가 되면 웬만한 의술로는 다스릴 수 없는 병이다.

아무튼 그 부자는 인근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여러 의원들을 불러 온갖 치료를 다 받았다. 하지만 아무런 차도도 보이지 않자 불공(佛工)을 드리려 행차하던 중에 요기를 하기 위하여 주청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때 호문경은 주청에서 가장 값이 싼 소면 한 그릇을 시켜놓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제 품속에 남아 있던 구리돈 삼 문마저 다 쓴 것이니 앞으로는 굶어야 할 판이었다.

"아이고, 아파!. 아이고…! 살살, 살살 좀 주물러! 아야야야!"
"어머, 미안해요. 알았어요. 살살 주무를게요"

의자에 앉아 있는 부자의 뒤에 있던 젊은 여인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너무도 월궁옥녀와 닮았기에 고개를 들었던 호문경은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여인의 손길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산전수전 다 겪었을 장년의 사내가 몹시 아프다는 듯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연신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흐음! 필경 오십견인 게로군. 어디 한번 봐 줄까?'

호문경은 소면이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판단하였다.

"허험! 어디가 편찮으시오?"
"아이고, 어깨가… 어깨가 아파 죽겠소이다. 아이고, 제발 살살 좀 주물러! 어깨다 부숴지겠다."
"어머! 상공, 이게 뭐가 아프다고 그래요? 그리고 어떻게 이보다 더 살살 주물러요? 어제는 괜찮다고 그러더니. 순 엄살쟁이!"

부자와 그의 첩실로 보이는 여인의 대화를 들은 호문경은 오래 된 오십견임을 짐작하고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부인, 오십견은 아무리 주물러봐야 통증이 사라지지 않소이다. 흐음! 보아하니 앓기 시작한지 오래 된 듯하나, 침 몇 방이면 고칠 수 있으니 잠시 비켜서 주시겠소이까?"
"이보시오. 침을 놓을 줄은 아시오?"

부자는 반신반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첫째, 아직 호문경이 새파란 애송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껏 이런 식으로 접근하여 은자를 뜯어내려던 자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 믿져야 본전 아닙니까? 자, 잠시만 참으십시오."

말을 마친 호문경이 품에서 침통을 꺼내 든 후 그 가운데 호침(毫鍼)으로 천요(天 ), 거골(巨骨), 승풍(乘風), 천종(天宗), 견요(肩 ), 견정혈(肩井穴) 등을 거침없이 찔렀다.

의복을 걸치고 있음에도 그의 손길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후후! 이제 어깨를 움직여 보십시오. 괜찮아졌을 것이외다."

수많은 의원들이 침도 놓고 뜸도 뜨고, 탕약까지 배가 부르도록 마셔댔건만 아무런 차도도 없던 지독한 오십견이었다. 그런데 불과 반각도 되지 않는 동안 침을 놓고는 괜찮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호문경을 본 부자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이보시오. 어디에서 침 놓는 법이나 제대로 배웠소? 지금까지 내 병을 고쳐보겠다고 왔다간 의원의 수효만 얼추 이백 명은 되는 듯하오. 그런데 아무도 못 고쳤는데 어찌 침 몇 방 놓고, 어! 어라…? 어깨가… 내 어깨가…? 어깨가 하나도 안 아파!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말을 하면서 슬쩍 어깨를 움직여 본 부자는 어깨가 부서질 듯한 통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면서 점차 어깨를 크게 움직여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자 거의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 거 보십시오. 소생이 방금 뭐라 하였습니까? 괜찮을 것이라 하였지요? 후후! 오늘부터는 매일 같이 어깨 운동을 좀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오십견으로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그럼 소생은 이만…"

말을 하던 호문경은 주방에서 소면을 든 점소이가 나오자 얼른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그저께 점심 때 먹은 이후 처음이었다. 잠시 후 국물까지 말끔하게 비우고는 소매로 입가를 씻었다.

한편, 한참이나 어깨를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한 부자는 가장 싸구려라 할 수 있는 소면을 맛있게 먹는 호문경을 보고 아직 세파에 찌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이날 호문경은 부자로부터 은자 백 냥이라는 거금을 받았다. 의원들이 왕진을 와서 침을 놓고 갈 때 보통 은자 한 냥을 지불한다. 그런데 인근에서 구두쇠로 소문났던 부자가 이같이 파격적으로 많은 은자를 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 호문경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치료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그 어떤 의원도 고칠 수 없던 고질을 너무도 쉽게 완치시켜준 고마움 때문이었다.

이날 이후 호문경은 의술이 은자를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이후의 중원행은 비교적 편했다. 세상 어디를 가든 환자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침으로 다스릴 수 있는 환자들은 미추노소는 물론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성심으로 치료해 주었다. 하여 남의(南醫)라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이후 중원행을 하던 그는 장강 이북을 주름잡는 천하제일의가 북의(北醫) 목재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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