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발렌타인데이를 아시나요?

등록 2003.02.13 15:51수정 2003.02.1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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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2월 14일)은 젊은이들이 연인의 날로 기념하는 발렌타인데이이다. 원래 '발렌타인데이'는 주위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을 한번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유통업체들의 상술에서 비롯되어 소비일변도로 왜곡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게다가 이젠 발렌타인데이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3월 이후 매달 14일을 화이트데이, 블랙데이, 옐로데이(로즈데이), 키스데이(레드데이), 실버데이, 그린데이, 뮤직데이(포토데이), 레드데이(와인데이), 오렌지데이(무비데이), 머니데이, 다이어리데이 까지 만들어내어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원래 발렌타인데이는 3세기 로마에서 기독교도를 박해할 때 사제인 발렌티누스가 순교한 날이다. 기독교가 종교로서 정식 인정을 받게 되면서 이 날은 ‘발렌타인 축일’로 정해진 것인데 이 날을 연인의 날로 기념하게 된 것은 14세기부터라고 한다. 16세기에 들어서부터 연인들이 사랑의 내용을 담은 특별한 형태의 축하카드를 주고받는 전통이 생겼다.

발렌타인데이를 ‘초콜릿 선물하는 날’로 만든 것은 70년대 일본 초콜릿 업계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생각해낸 상술이었으며, 한국에서는 이 잘못된 일본의 풍속을 맹목적으로 수입한 것이 그 유래이다.

지금 유통업체들은 '발렌타인데이' 행사에 열을 올린다. 롯데, 신세계, 현대 등 대형 백화점들은 식품관에 초콜릿행사장을 따로 마련하고, 국내산보다 20∼30배나 비싼 외국 초콜릿까지 수입해 팔고 있다. 화장품 매장에서는 20대 연인을 대상으로 테마별 향수 퍼레이드를 개최하는 등 말 그대로 축제를 연다.

파는 상품을 보면 젊은층을 위해서 반지, 팬티, 시계, 휴대폰줄 등 다양한 커플상품을 권유하는 것은 물론 이젠 중년층을 위한 과자와 고급 초콜릿에 어울리는 와인, 홍차 등을 구비해 놓고 화장품 등 경품과 함께 호객행위에 혈안이 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발렌타인데이의 의미를 되찾자는 대안운동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확산되고 있다.


한국대학생대중문화감시단은 국적 불명의 밸런타인데이가 상업적, 감각적 소비문화로 변질됐다는 판단에서 이의 대안으로 자신을 희생해 세상을 훈훈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캔들데이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또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갈골 한과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인 15일 하루 동안 연인과 가족들이 참여하는 한과만들기 체험행사를 열고, 다른 시민단체들도 엿이나 떡 등을 나눠먹자는 ‘신토불이 발렌타인데이 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한국형 연인의 날

‘발렌타인데이’ 즉 ‘연인의 날’은 우리 조상들의 풍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정월대보름과 경칩 그리고 칠월칠석은 연인들을 위한 아름다운 세시풍속이 있었다.

신라시대 때부터 정월 대보름에는 처녀들이 일년 중 단 한번 공식적으로 외출을 허락 받은 날이었다. 그 외출은 '탑돌이'를 위한 것이었는데 미혼의 젊은 남녀가 탑을 돌다가 눈이 맞아 마음이 통하면 사랑을 나누는 그런 날이다.

탑돌이 중 마음에 드는 남정네를 만났지만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채 울안에 갇혀 사는 처녀들의 상사병(相思病)을 '보름병'이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세조 때 서울 원각사(圓覺寺) '탑돌이'는 풍기가 문란하여 금지령까지 내렸다. 따라서 이 대보름날은 바로 우리나라 토종 연인의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경칩날 젊은 남녀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징표로써 은행씨앗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은밀히 은행을 나누어 먹는 풍습도 있었다 한다. 이날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밖에 있는 수 나무 암 나무를 도는 사랑놀이로 정을 다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칠월칠석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칠월칠석 역시 우리 고유의 연인의 날이라 할 수 있다. 예부터 칠석날에는 시집가는 날 신랑 신부가 같이 입을 댈 표주박을 심고, 짝떡이라 부르는 반달 모양의 흰 찰떡을 먹으며 마음 맞는 짝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벤처농업인들은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칠월칠석을 '견우와 직녀의 날'로 정하고 3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발렌타인데이 다음날인 15일은 정월대보름이다. 이 대보름날 아침 일찍 날밤, 호두, 은행, 잣, 땅콩 등의 견과류(단단한 껍데기와 깍정이에 싸여 한 개의 씨만 들어있는 열매)를 깨물면서 "일년 열두 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하며, 깨물 때 '딱' 하는 소리에 잡귀가 물러간다고 생각했다.

또 평안도 의주의 풍속에 젊은 남녀가 이른 아침에 엿을 씹는 '이굳히엿'이라는 풍속이 있는데 부럼깨기와 비슷한 것이다.

견과류는 암을 억제하는 물질인 '프로테아제 억제제'와 '폴리페놀류'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암예방 효과가 있으며, 또한 항산화 효과가 있는 비타민 E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 노화방지에 효과가 있고, 불포화 지방산의 함량이 많아 콜레스테롤을 낮춰준다고 전해진다. 정월대보름의 '부럼깨기'로 한겨울 동안 추위에 시달린 체력을 증강시킬 수 있도록 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엿보인다.

그것뿐 아니라 견과류를 깨물고, 먹으면 턱이 발달되어 턱관절염 등이 생길 염려가 없고, 뇌발달에 아주 좋다고 한다. 대신 초콜릿은 부드러운 음식이어서 턱관절이나 뇌발달에는 좋은 음식이 아니다. 또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구토나 설사, 다뇨, 흥분, 발열, 부정맥, 운동 실조, 근육의 경련, 발작, 복통, 혈뇨, 탈수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고, 때로는 혼수상태에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상술에 휘둘려 별로 좋은 음식이 아닌 초콜릿을 무조건 주고받는 것이 아닌 좀더 의미있는 연인의 날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이런 좋은 세시풍속을 가진 겨레답게 상술로 왜곡되어진 서양문화에 매몰되는 않았으면 한다.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한국형 연인의 날’을 찾아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 가면 좋지 않을까? 이번 정월대보름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은행과 짝떡을 먹으며, 탑돌이를 해보자. 또 봄이 오는 길목에 있는 정월대보름과 경칩을 우리의 새로운 도약의 날로 삼자.

산길을 돌아 훈훈한 마파람과 함께 저 멀리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숨결을 호흡하는 것은 초콜릿 같은 상술이 아니리라. 그저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풍속이 말해주고 있음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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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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