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만든 동구밖 꽃밭이 아직 선하다

마음의 고향에 꽃씨를 뿌려보자

등록 2003.02.27 01:40수정 2003.02.2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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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알려드립니다. 내일, 동구 밖 꽃밭을 만들려고 하니 어린이 여러분과 청소년 그리고 청년회 회원 여러분께서는 한 분도 빠짐없이 아침 8시까지 삽과 괭이, 낫을 들고 아래 다리거리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새봄을 맞이하여 동네 꽃길 조성을 하고저 하오니 내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다리거리로 모두 모여주세요. 이상 청년회장이 말씀드렸습니다."

70년대 중반 토요일 2월 어느날 종일 비가 내렸다. 우수(雨水)가 지난 터라 '는개(안개처럼 뿌연 비)'가 부슬비, 이슬비로 바뀌더니 가볍게 부는 바람을 타고 봄비가 내렸다. 비는 잠자는 개구리 발목을 적실 만큼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추적추적 부슬부슬 힘없이 오래 내린 비는 동네 꽃밭을 만들라는 신호였다. 당일인 일요일 새벽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날 따라 일찍 깬 햇님 덕에 동네엔 생기가 돌았다. 백아산 정상 부근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청년회 회장님의 마을 방송에 예닐곱 되는 아이에서부터 초·중고생, 20대 청년들까지 근 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자 연장을 들고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세수를 하지 않은 초등학생들은 눈꼽 떼느라 정신없다. 양지마을은 봄맞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어린애들은 '호맹이'(호미)와 녹이 슬어 날이 무뎌 땅 파는 데는 전혀 쓸모 없을 부삽을 들고 나왔고, 초등학생은 약괭이를 들고 나왔다. 중학생부터는 제대로 된 낫과 괭이를 들고 큰 형님들은 나무로 된 긴 수레를 세 개나 준비해놨다. 몇 명은 갈퀴를 들고 있다.

썩음썩음한 가마니에 긴 나무를 끼워 넣어 만든 '들것(물건을 둘이서 나를 때 쓰는 도구로 짚 가마니나 부대 자루에 나무를 끼워 만들어 돌이나 무거운 짐을 옮길 때 쓰던 도구. 일본말로 '당까'라고 함)'을 청년회 측에서 마련했다. 연장은 이거면 충분하다. 해마다 해오던 일이라 특별히 지시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하나씩 들고 나오면 동네꽃밭 만드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먼저, 청년회 회장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다 나와준께 금방 끝나것구만요. 거시기 뭐냐 순자도 나왔고, 병문이도 나왔네. 다들 고맙다. 작년에도 해봤응께 다 알 것잉께 긴말 안 할랑게 잘 들 해보자고.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해마다 우수가 지나고 비가 온 다음날 꽃밭을 맹글았어. 청년들과 청소년 여러분들이 나서서 마을을 가꾸면 새마을이 된당께. 다른 마을보담은 더 이쁘게 만들어야 어른들도 칭찬허고 면장님도 우리 마을에 더 좋은 생각을 한당께. 알겄제?"


일동 "예" 한다.

"글고 자세한 작업 방법은 오늘 작업 반장인 청년회 김양호 총무님께서 해주실 것인께 잘 듣고 따르더라고~"


"김양홉니다. 간단히 말씀드리것씀니다. 저기 소로골 쪽에 가면 돌이 많이 있응께 청년들과 고등학생들은 같이 가서 이쁜 돌로 골라 싣고 오시고, 청년 몇 사람과 고등학생 몇 명은 가까운 '뒷골'하고 '가는골'에 가서 '참꽃'(진달래)하고 개나리, '개꽃'(산철쭉)을 좀 캐왔으면 좋것구만. 중학생 여러분은 꽃밭 만들 바닥을 괭이와 삽으로 파면 될 것이구만…. 글고 우리 어린이들은 언니 오빠, 형들이 하는 데서 자갈을 골라내면 될 거시여. 서로 도와가며 하면 금방 끝낭께 즐겁게 한 번 해보더라고~. 글고 뭣 보담도 다치지 않게 찬찬히 해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되겠제?"

일동 "예"

각자 임무가 맡겨졌다. 한 조 당 다섯 명이 기본이 되었다.

오리(五里)는 됨직한 '소로골'로 간 무리는 수레 두 개를 길가에 바쳐두고 개울 건너 돌무지가 있는 산으로 올라가서 살아있는 푸른 이끼가 낀 돌을 고른다. 서너 차례씩 끙끙거리며 보듬고 와 길에 부리고 바삐 또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돌이 쌓이자 두 명씩 남아 수레에 싣는다. 열대여섯 덩이를 싣고 울퉁불퉁 패인 자갈 흙 길에 빠지면서도 군말 없이 잘 내려왔다. 이러기를 다섯 번을 했다. 그나마 작년 것이 있어서 이 정도로 가능하니 다행이다.

'뒷골'로 간 친구들은 괭이와 삽으로 진달래와 흰철쭉, 산철쭉을 뿌리가 다치지 않게 캐고, '가는골'에서는 개나리와 화살나무 그리고 움트기 시작한 참나리를 캐느라 시끌벅적하다. 가시가 있는 사철 푸른 노간주나무도 세 그루 캤다. 들것에 실어보았자 두 그루 이상 싣지를 못한다. 손으로 둘이서 떼 메고 오는 이는 캐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800여m 되는 밭둑으로 나무를 옮기느라 헉헉거린다. 그러다보니 질퍽한 밭과 논으로 가로질러오기 일쑤다.

회장님은 동구 밖에서 어린 친구들을 돌봐주며 열심히 땅을 파고 있다. 이장(里長)님과 부녀회장님께서는 앙꼬(팥소) 든 빵과 사카린 탄 물을 한 바께스 들고 나오셨다.

"어이~ 좀 쉬어가면서 하더라고?"
"이장님 나오셨소? 오늘따라 많이 참석해 준께 수월하구만이라우. 근디 뭐 이런 걸 다 갖고 오셨다요?"
"별 것 아닝께 하나씩 먹고 후딱 해부러~. 야들아 와서 묵고 혀라."
"학생들 잠시 쉬었다가 먹고 하자고~."

흙 뭍은 검둥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날 빵은 두 개씩 돌아가지는 않았다. 원체 많은 사람이 나왔기 때문이다. 달작지근한 물 한 잔씩 더 먹는 걸로 나머지 배를 채웠다.

다시 일이 시작되었다. 땅 파는 아이들은 괭이와 삽으로 냇가 쪽 길 가장자리를 폭 1.5미터로 100여 미터를 파고 돌을 골라내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꽃길은 좁은 동네 입구를 더 비좁게 했다. 그래도 어른들은 뭐라 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꿈을 심는 일이라 생각하고 매년 이 때쯤 농사준비에 바빠도 아이들이 동네 일 나가는데 반대하지 않았다.

아이들 주먹만한 돌은 시냇가로 버리지 않고 길바닥 패인 곳에 오복이 쌓았다. 군데군데 작년에 심었던 꽃과 나무들이 있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정성을 기울인다. 더 죽어 흐물흐물해진 코스모스 대를 베어내는 것도 이 친구들 몫이다. 평소 꼴베고 나무하던 실력을 이때 모여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땅을 파면서도 형들이 갖고 온 돌을 잘 심어 쌓기 위해서는 고랑을 좀 깊게 파야 했다. 아직 남아 있는 돌은 다시 쓰면 되므로 따로 옆에 세워뒀다. 작년 가을 미리 받아 둔 코스모스, 과꽃, 봉숭아, 나팔꽃, 백일홍 씨 봉지를 풀어 듬성듬성 뿌리는 일은 중학생 정도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힘 있는 형들이 산에서 다 돌아와 허기를 달래고 합류하자 다리거리 일대는 멀리서 봐도 대공사가 벌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길을 따라 돌을 자연에 어울리게 줄지어 높낮이가 각기 다르게 쌓고, 가져온 나무도 군데군데 심어나간다.

다른 어떤 나무보다 더 조심스러웠던 것은 참꽃 진달래였다. 조금이라도 주의를 하지 않으면 '또깍' 부러지고 마는 연약한 줄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개나리는 조금 줄기를 잘라서 심는다. 산철쭉과 흰철쭉도 심었다. 참나리는 원줄기 뭉치와 새로 싹을 틔운 자잘한 것을 적절히 배치한다. 화살나무는 무리를 지어 가을철 단풍이 들게 모아서 심는다.

길어진 해 덕에 오후 2시를 넘기자 대충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나온 동네의 꿈나무들은 어제 내린 비로 흙 범벅이 되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동량(棟樑)들은 망웃짐(퇴비를 바지게에 진 짐)을 지고 밭으로 나간 이가 여럿 있었다.

시간이 흘러 국화를 심고, 장미를 심어 더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 전만큼 정겹지는 않았다.

남획과 불법 채취가 아닌 야산 꽃과 나무를 동네에 옮기는 행사는 마을 잔치다. 마침 비도 내리고 했으니 봄맞이 대청소를 잠시 미루고 한 번 마음의 고향에 꽃씨를 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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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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