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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는 늘 칭찬만 받는 아이. 학교 가도 모나지 않으며 공부도 전교에서 3~4등은 하는 모범생. 여학생들에게 인기 짱인 사내. 키가 작을 뿐 나무랄 데 없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있었다.
평소 매 맞을 일은 애초에 없을 성 싶던 그 아이는 탄탄대로 뻥 뚫린 자신의 길을 '룰루랄라' 즐기며 그날도 평소보다 약간 빠른 세상살이를 하고 있었다. 1982년 가을 나른한 토요일 오후 책상에 앉아 자습을 하는 친구들의 꼬드김 반 자의 반으로 근질근질한 몸에 피로를 풀어줄 겸 아이들을 비밀리에 꼬셔대기 시작했다.
"야 규환아, 이발하러 안 갈래?"
"응?"
"학천으로 이발 가자"
"좋아, 근데 우리끼리만 가기에 좀 그렇지 않냐?"
"그럼, 몰래 대여섯 명에게 더 말해보자."
"그래."
시끌벅적한 틈을 보아 삽시간에 같이 갈 친구들을 물색하였다. 책을 닫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농업 전공이셨던 담임 선생님은 학교 관사에 사시면서 짬을 내 벌(蜂)을 치셨다. 마침 선생님도 안 계신 터라 뭔가 모의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간 크게 8명이나 모아 놓고 실장에게 다가갔다.
"점호야! 우리 이발 좀 하고 올 테니까 그리 알아라."
"선생님께서 여쭈시면 이발하러 갔다고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나 재차 확인했음에도 점호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뭔 일 있을라고?' 하며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와 면사무소 근처로 갔다. 일행은 이발소로 가지 않고 튀김집으로 향했다. 아침에 등교 버스에서 아이들이 일러줬던 '박치기 왕 김일' 프로레슬링을 보러 들어간 것이다. 같이 간 친구들 호주머니를 털어 보니 차비 빼고 1000원이나 되었다. 몽땅 고구마 튀김을 샀으니 하나에 10원씩 하던 때라 100개나 줬다.
한 입씩 베어 물고 다들 TV 앞으로 몰렸다. 중계방송에 쏠려 먹는 속도는 평소 같지 않다. 링 위에 오르자마자 옷도 벗지 않은 채 관중들에게 두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하고 있는 김일 선수. 갑자기 일본 이노키 선수가 발로 한번 까 제꼈다. 움칫 물러난 김일 선수는 주위를 경계하며 심판의 도움을 받다 마저 옷을 벗는다. 화면이 흑백이어서 김일 선수는 까맣고 착 달라붙은 팬티를 입었다. 이마는 번쩍번쩍 빛났다.
"땡!"하고 공이 울리자 둘은 팬티만 입은 채 서로 껴안고 밀고 밀치느라 거의 한 몸이 되어 뒹군다. 몇 번의 탐색전이 이어지더니 우리 선수가 밀리기 시작한다. 이노키가 김일 선수 몸통을 잡고 "휙-" 돌려 링 위에 내리꽂는다. 다시 일으켜 세워 한 손을 잡아 밀치더니 링 로프를 이용하여 이쪽에서 저쪽으로 세게 밀쳐 되돌아오는 김일 선수를 "붕-" 떠서 두 발로 차 넘어뜨린다. 바닥에 어깨를 짓누르자 심판관이 "원-투-" 숫자를 세어 나가자 허리힘과 발, 뱃심을 이용 풀쩍 뛰어 빠져 나오는 우리 김일 선수!
학생들 박수와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제아무리 이노키가 잘 해도 김일이를 당하겠냐?"
먼저 일어난 김일 선수가 이번엔 이노키의 긴 머리를 잡아당긴다. 상대 선수가 빠져나가려고 빡빡 밀어버린 김일 머리통을 밀쳐 내지만 미끄러지기만 할 뿐 별 소용없다. 잔잔한 공방이 이어지더니 이내 김일 선수의 주특기가 발휘되고 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김일 선수와 호흡과 리듬을 맞춰 "박치기!" "박치기!"를 연발한다. 정수리 부근에 날벼락이 꽂힌다. 얼럴럴 정신을 못 차리는 상대 선수.
시간이 흘러 김일 선수의 돌덩이가 연신 박히자 혼비백산 차츰 기력을 잃어간다. 이번에는 이노키 한 손을 잡아 링 로프에 밀쳐 반동을 줘 상대 선수가 튕겨 나오자 특유의 동작인 한 발을 들어 콱 덮치는 시늉을 하더니 높이 날아 무지막지하게 정면으로 돌진해 들이받는다.
얼떨떨을 넘어 이제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연거푸 두 번을 더 박치기를 해 대매 일본 선수는 로프 사이로 몸이 빠져나가 밖으로 튕겨 나갔다. 두리번거려 보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30초에 가까운 시간을 거의 허비하고 간신히 기어올라온 상대 선수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박아 버리자 사지를 쫙 벌리고 바닥에 뻗어버렸다. 그 뒤로 일어나지를 못해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KO로 이겼다.
30여 분 간 혼이 빠진 아이들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다. 사실 이발을 하러 간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다른 때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던 지라 그 역사적 장면을 지켜볼 뿐이었던 순진한 친구들. 이발도 하지 않고 느릿느릿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우리가 TV를 보던 사이 선생님께선 중간 확인 차 교실에 들어오셨다.
"실장? 다들 어디로 갔나?"
"예, 이발하러 간 학생들 명단 칠판에 적어놨습니다."
그 뒤로 선생님은 자신의 일을 돌보러 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조심 뒷발을 들며 교실로 접근을 해도 예사롭지 않게 조용한 게 뭔 일이 터진 게 분명해 보였다.
"다들 이리 나왓!"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차!' 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인솔자 김규환이지?"
"예."
"너희들 이발하러 갔으면 일찍 돌아올 것이지 뭣들 하고 온 거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선생님 놀다 왔습니다."
"뭣하면서 놀다 왔냐니까?"
워낙 강경하게 나오자 한 아이가 대답했다.
"선생님, 김일 프로레슬링 보고 왔습니다."
울그락 불그락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선생님 얼굴을 봤다.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다들 종아리 걷어!"
"김규환이부터 앞으로 나왓!"
"칠판 잡아라."
'또 하나의 공포'가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를 맞는 그 두려움. 두 대 까지는 별일 없이 잘 넘어 갔다. 세대 째 부턴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살점이 터지는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선생님을 빠져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른 앞으로 왓"
"빨리 안 올거여?"
선생님 말은 들리지 않고 맞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선생님에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대여섯 발을 더 물러서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선생님이 그 긴 걸음으로 나를 체포해 칠판 앞으로 끌고 갔다. 이 때부터는 그 큰 키로 칠판에 나를 걸다시피 하여 때렸다. 본격적인 매타작이 시작외었다.
"탁"
"타닥타닥"
"타다닥 탁탁"
몇 대를 더 맞자 쇠가 살에 박히는 느낌이다. 그 때 '아이들은 그 동안 어찌 이렇게 아픈 매를 참고 견디며 살았을까? 나 같으면 학교 때려치우고 농사나 짓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지경이었다.
20대를 간신히 채우고 또 한 번의 도망을 감행했다. 4분단으로 나뉜 틈을 찾아 교실을 두 바퀴나 돌았다. '뛰어봤자 벼룩이라 했던가?' 이내 잡혀 48대 까지 맞았다. 헤아린 숫자가 그러하니 50대를 넘게 맞은 나는 일본의 이노키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매도 맞아본 놈이 맞는다'고 그날까지 정말 매 맞는 것은 내 체질이 아니었다.
이내 침착해지시더니 나를 본보기로 때렸음을 실토하시고는 아이들은 5대 씩만 때리셨다. 따끔한 충고를 하시고는 다들 집에 갈 준비하라 하신다.
다음 해 학생주임이 되신 선생님은 내 생활 전반을 꼼꼼히 챙겨 주셨다. 여자 친구와의 사이도 알고 있었지만 크게 나무라지 않으시고 건전하게 사귀라고 타일러 주신 분. 고교시절 몇 번 찾아뵐 때도 선생님은 "규환아, 해림이랑 잘 지내냐?" 하고 놀리기도 하셨다. 그 선생님을 28살 되던 해 첫사랑 해림이 결혼식장에서 뵈었다.
숙제를 해 가 본 적이 없는 고교시절에 매는 매일 내 생활이었지만 아직도 눈에 선한 첫 매 맞은 경험은 첫사랑의 기억처럼 짜릿하여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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