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64

으으…! 이제 죽었다. (4)

등록 2003.03.02 14:18수정 2003.03.0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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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충언(忠言)은 역이(逆耳)이나 이어행(利於行)하고,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라고 했어요. 쓰다면 몸에 좋은 것이네요."
"뭐라고? 허허, 녀석!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냐?"

"어머! 훈계라니요? 제자가 어찌 감히 사부님을…?"
"허허허! 되었다. 되었어. 자, 그건 그렇고 사부가 이렇다고 무공연마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럼요. 자는 시간을 빼고는 오로지 무공 연마에 몰두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오냐! 아암, 그래야지."

"호호! 그래서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이제 웬만큼 능숙해졌어요."
"호오! 그으래? 장하구나. 그럼 다음으로 넘어 가야지. 자, 가서 유라를 데리고 들어오너라."
"호호호! 예, 알겠습니다. 사부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살짝 고개를 숙였던 사라가 밖으로 사라지자 초인악의 눈에서 흐뭇하다는 빛이 흘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공의 무(武) 자도 모르던 제자들이 마치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쑥쑥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몹시 좋아진 것이다.

"쿨룩! 쿨룩! 에구… 내가 오래 살아야 저것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볼텐데… 쿨룩! 쿨룩! 우욱! 우우욱!"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던 초인악은 한 덩이 선혈을 토했다. 그러고 나서야 조금 괜찮아졌는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으으! 이, 이건…? 휴우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군."


초인악은 핏덩이 속에 섞여 있는 이물질들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혼신을 다해 억눌렀던 독약이 드디어 효과를 내는 모양이었다.

"휴우…!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선의 탈을 쓴 그 악마를 응징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구나."

초인악의 감긴 두 눈에서는 한 줄기 이슬이 흘러내렸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 젊은 청년이었던 초인악은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 도에 의하여 부친의 수급이 베어지자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는 사이 비명을 지르던 모친의 심장마저 갈라지고 있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과 눈만 크게 뜨고 있을 때 흉수는 초인악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극심하게 비명을 지르며, 반항하는 한 여인을 끌고 와 무참하게 능욕하였다. 그 여인은 초인악의 정혼녀이자, 사매였다.

잠시 후 욕심을 채운 흉수는 흉물스런 괴소를 머금고 다가와 한 알의 단약을 먹이고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그리고는 불까지 지르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 순간 초인악은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말을 잃고 있었다. 만행을 저지른 흉수가 초지악이라는 쌍둥이 형이었기 때문이다.

초인악 형제의 부친은 당시 천하제일도라 불리던 일월신도(日月神刀) 초구혁(草玖爀)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강호에 출도한 그는 삼십 년 동안이나 혁혁한 무명을 떨친 무림명숙이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일월도법은 가문의 비전도법이었다. 그렇기에 외인에게는 전수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월신도는 제자를 거두었다.

유향선자(萸香仙子) 우문경(于門卿)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일월신도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명지은을 베풀고 대신 죽은 은인의 혈육이었다. 그래서 전례를 깨고 제자로 거둔 것이다.

당시 열 여덟이었던 그녀는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너무도 아름다웠다. 하여 둘은 그녀의 방심을 얻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일월도법이 기록된 비급은 전반부 십팔 초식과 후반부 십팔 초식이 기록된 상, 하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가문의 누구에게든 전수가 되지만 하권은 오로지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인악 형제는 그때까지 전반부 십팔 초식만 익히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전반부 십팔 초식만 가지고도 강호의 웬만한 고수와 손속을 나누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후반부 십팔 초식이 얼마나 강한지 가히 짐작이 갈 정도였다.

일월신도 초구혁은 두 형제를 불러놓고 선언한 바 있었다. 둘로 하여금 비무케 하여 승자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다. 차기 가주라는 직위와 일월도법 후반부 십팔 초식이 기록된 하권, 그리고 유향선자와의 혼례가 그것이었다.

둘은 이를 악물고 무공 연마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치열한 박투를 벌였다.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십만 초식을 주고받은 결과 불과 반 초 차이로 동생인 초인악이 승리하였다.

그날 밤, 초인악은 사매인 유향옥녀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초인악이 이기길 마음 속으로 빌었다고 고백하였다.

초인악과 초지악은 쌍둥이 형제이기에 모든 것이 똑같지만 한 가지 성격만은 달랐다. 동생이 광명정대한 성품이라면 형은 약간 삐뚤어진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왠지 거부감이 일었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질투 어린 눈빛으로 둘을 노려보던 초지악의 눈에는 독랄함이 스쳤다. 그리고 며칠 후 천인공노할 만행이 저질러진 것이다.

일월신도 부부는 산공독(散功毒)에 중독되었기에 변변한 저항조차 못해보고 자식의 손에 비명횡사하였다. 그것은 초인악과 유향선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지악이 하나뿐인 샘에 산공독을 풀어 모두가 중독되었던 것이다.

홀로 남겨진 초인악은 형이 먹인 단약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치를 떨었다. 그러는 한편 황급히 체내에 흩어져있던 독을 한쪽 다리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러는 동안 무참하게 능욕 당한 유향선자는 미친 듯이 울부짖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인에게 있어 청백이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그것을 원치 않는 사내에게 잃었기 때문이었다.

초지악이 먹인 독은 오보추혼독(五步墜魂毒)이라는 것이었다. 다섯 걸음을 옮기기 전에 전신이 썩어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지독한 절독이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정이 다르다. 다시 말해 걷지 않으면 한동안은 독이 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지악이 직접 죽이지 않고 오보추혼독을 먹인 이유는 차남이면서도 가주 직을 탐냈기 때문이다. 가주란 의례 장남이 맡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무에서 알아서 양보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괘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참하게 능욕 당한 유향선자를 보며 심적인 고통을 느끼라는 악랄한 의도에서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일월도법이 기록된 비급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사매이자 정혼녀인 유향옥녀를 겁간한 그에게 어찌 가문의 비급을 건넬 수 있겠는가!

초인악은 부친으로부터 아직 비급을 건네 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초지악은 미친 듯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비급을 찾을 수 없었다.

떠나기 전 초지악은 이를 갈면서 불을 질렀다.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인악은 다리까지 자르면서 오보추혼독을 몰아 낸다고 몰아냈지만 전부 다를 없애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상당량이 여기저기로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엔 내공의 힘으로 억눌러왔다. 하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간혹 선혈을 토하곤 하였다. 하지만 오늘처럼 내장 부스러기가 섞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여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 정말 괜찮으세요? 탕약을 더 달일까요?"
"허허! 아니다. 이제 좀 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사라와 유라는 창백한 사부의 안색을 살피며 근심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부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니 푹 쉬셔야 해요. 제자들이 나가서 토끼나 노루라도 사냥해 올 터이니…"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그러니 나갈 필요 없다. 그저 있는 약이나 잘 달여 먹으면 쾌차할 것이야. 그나저나 오늘은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주마. 잘 듣거라."
"호호! 정말이요? 정말 옛날 이야기를 해 주실 거예요?"

옛날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흥미진진한 법이다. 그것은 중원인이나 서장인, 혹은 서역인이라 할지라도 모두 같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라와 유라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이었다. 어떤 쌍둥이 형제가…"

오늘 따라 왠지 몹시도 초췌해 보이고 노쇠하다는 느낌이 드는 초인악의 이야기는 참으로 길었다. 초저녁에 시작한 이야기가 닭이 홰를 칠 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즐거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하였으니 길어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사라와 유라는 울고 웃으며 이야기에 장단을 맞췄다. 하지만 새벽녘, 둘의 표정은 몹시 굳어 있었다. 초지악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휴우…! 이미 짐작했겠지만 사부가 바로 그 아우다."
"……!"

마음 속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가 그렇다는 이야기에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도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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