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65

으으…! 이제 죽었다. (5)

등록 2003.03.03 14:29수정 2003.03.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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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이제 이 사부는 얼마 못살 것 같구나."
"어머! 아니에요. 제자들이 매일 같이 약을 달여 드릴게요. 그러니 그런 불길한 말씀하지 마세요."

"허허!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이젠 세상의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쓸데없이 약을 달이거나 하지 말아라. 알겠느냐?"
"사부님…!"


"대신 너희에게 부탁이 있구나. 무공이라고 얼마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너희에게 부탁을 해서 미안하구나."
"흐흑! 아니에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흐흐흐흑!"

사라와 유라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혈색을 유지하던 초인악의 입술이 삽시간에 파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얼굴 전체가 시커멓게 변했던 것이다.

"고맙구나. 그럼, 이야기를 할 터이니 잠시 돌아앉거라."
"도, 돌아앉으라고요?"

"그래, 너희들 등에 무언가를 써 주려고 그런다."
"아, 알았어요. 언니, 뭐해? 어서 돌아앉아!"
"으응! 그래, 알았어."

사라와 유라가 돌아앉자 초인악은 언제 골골했냐는 듯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속도로 둘의 백회혈(百會穴)을 짚어갔다.


"사, 사부님…!"
"너희에게 개정대법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 적이 있으니 이 대법을 시행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

초인악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를 사라와 유라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개정대법(開頂大法)이란 체내에 있는 공력을 타인에게 주는 것으로 이것이 시전될 때에는 말을 하거나 움직여서는 안 된다.


개정대법으로 공력을 받는 자는 내공의 증진을 볼 수 있으나 주는 자는 모든 공력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에 사라와 유라는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곧 죽을 거고, 죽으면 썩어질 놈의 살이니 아까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

"휴우…! 그냥 이렇게 인면수심(人面獸心)인 그자의 정체를 밝히기 못하고 가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 사부가 죽거든 침상을 들춰보도록 하여라. 알겠지?"
"……!"

사라와 유라는 백회혈을 통하여 뜨거운 기운이 들어오자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사부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잘들 있거… 으으윽!"

개정대법이 끝나갈 무렵 초인악은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는 스르르 쓰러졌다. 그런 그의 시신은 온통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지독한 독성을 지닌 오보추혼독에 중독 당한 결과였다.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 노인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흐흑! 사부님…! 이렇게 가시면 저희더러 어찌 살라고… 흐흑!"
"아아아앙! 사부님! 사부니임! 아아아아앙!…"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있다. 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부가 갑작스럽게 죽자 사라와 유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잠겨 오래도록 오열하였다. 갑작스런 사부의 죽음이 너무도 불쌍하였기 때문이었다.

* * *

"사부님! 사부님! 흐흐흑! 정신 차리세요. 사부님!"

사라와 유라 자매의 눈에서 옥루가 흐르고 있을 때 대흥안령산맥 아래 자그마한 모옥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으으으! 으으으으…!"
"사부님! 제자, 일정입니다. 사부님, 정신 차리세요."
"으으으! 으으으! 저, 정아냐? 으으으! 끄으응…!"

연신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던 북의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지자 장일정은 황급히 사부의 맥문을 잡았다. 혹시 절명(絶命)했나 싶어서였다. 허나 다행히도 맥은 뛰고 있었다. 혼절한 것이다.

오늘 장일정이 북의를 찾아온 것은 남의와 월하옥녀가 출타를 했기 때문이었다. 둘은 매년 의성장(醫聖莊) 식솔들이 비명횡사한 날이 다가오면 절을 찾아 명복(冥福)을 빌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길은 적어도 열흘은 걸리는 먼 길이었다. 그동안 홀로 있을 바에는 차라리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부에게 문안을 여쭙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월하옥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이곳이 가까워 질 무렵부터 장일정은 왠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하여 도착하자마자 여러 번 사부를 불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여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모옥의 문을 열자 그곳에 사부가 신음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장일정은 황급히 침을 꺼내 들고는 이곳 저곳에 시침을 하였다. 제아무리 경각지경에 달한 위급한 환자라 할지라도 적어도 유언을 남길 정도만큼은 제정신이 들게 하는 묘방(妙方)이었다.

과연 침술에 효과가 있었는지 북의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으으으! 으으으…!"
"사부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으으으! 저, 저거… 으으으…!"

북의가 가리킨 것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붉은 색 줄이 있으며, 머리에 닭의 벼슬과 같은 것이 달려 있는 엄청나게 큰 뱀이었다. 길이가 무려 일 장이나 되는 그것은 몸통의 둘레가 어른 허리보다도 더 굵었다. 가히 대망(大 )이라 할 만하였다.

이것은 이무기에 속하는 화관홍선사(花冠紅線蛇)라는 놈이다. 엄청나게 큰 이놈은 죽은 듯 꼼짝도 않고 있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장일정이 열두 살 때 이놈을 잡기 위하여 대흥안령산맥 가운데서도 가장 음침한 곳에 자리한 사왕곡(蛇王谷)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화관홍선사가 보통 뱀들처럼 대략 두자 남짓한 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깡 좋게 사왕곡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처럼 큰 줄 알았다면 아마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기세 등등하게 사왕곡으로 향했던 장일정은 재수 없게 다른 뱀에게 물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이다.

만일 사왕곡에 당도했다면 화관홍선사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평범한 독사에게 물렸던 것이 전화위복이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남의와의 인연을 쉽게 맺을 수 있지 않았던가!

"으응? 사부님! 정신 좀 차리세요. 사부님!"

조금 전에 시전한 수법은 죽어 가는 사람도 정신이 들게 한다는 회혼침(回魂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을 차렸던 북의는 또 다시 혼절한 듯 하였다.

이에 장일정은 황급히 사부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맥도 짚어 보았다. 그러면서 하의를 걷어 올렸다. 혼절하기 전에 화관홍선사를 가리켰으니 혹시 놈에게 물린 것을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북의의 종아리 아래에는 뱀에게 물린 자국치고는 제법 큰 상처가 있었다. 시퍼렇게 부푼 그곳은 뜨겁기까지 하였다. 한참 독이 번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아앗! 이건…? 으음! 안 되겠군. 쯔으으으읍! 퉤에! 쯔으으읍!퉤에! 쯔으으으읍! 퉤에!…"

장일정은 품에 지니고 있던 참침( 鍼; 외과의 메스처럼 생긴 날이 달린 침의 일종)을 꺼내 상처 부위를 절개하고는 즉각 빨아냈다. 잠시 후 시퍼런 빛을 띄며 부풀어올랐던 종아리는 붓기가 빠지면서 서서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쯔으으읍! 퉤에! 쯔으읍! 퉤에!…"

몇 번 더 독혈을 빨아내자 선홍색 선혈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웬만큼 독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얼마간은 전신으로 번져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혼절한 상태인 북의의 맥문을 짚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장일정은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황급히 품을 뒤졌다. 생사잠(生死簪)을 꺼내 든 그는 그것을 물그릇에 담갔다.

그것은 만사지왕이라는 일각사왕의 뿔이 들어 있기에 이 세상의 어떤 독이라도 해독시킬 수 있는 효능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것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혼절해 있던 북의의 눈이 떠졌다. 체내의 독이 모두 해독되어 그런지 그의 안색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부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으으으…! 너, 너는 정아!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나?"

북의는 혼미한 상태에서 장일정을 본 것을 꿈을 꾼 것으로 착각하였는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부님! 어찌 된 일입니까?"
"휴우…! 그렇다면 그것이… 으으음!"
"……!"

장일정은 사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는 그저 침묵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정아야! 저놈의 배를 갈라보도록 해라."
"예에…?"

한참 생각을 하던 북의가 약간 이맛살을 찌푸리며 화관홍선사를 가리키자 장일정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화관홍선사는 단순한 뱀이 아니었다. 이미 이무기가 되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할 만큼 징그럽고 끔찍해 보였기 때문이다.

"허허! 녀석… 놈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저놈을 잡으려고 이 사부가 지난 몇 달 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으으윽!"

말을 하던 북의는 가슴이 아픈지 또 다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으으음! 괜찮다. 그나저나 어서 저 놈의 배를 갈라보도록 해라. 시간이 더 흐르면 썩어 버린다."
"예! 알았습니다."

장일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화관홍선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의 엄명을 어찌 거부하겠는가!

"아랫배를 보면 흰 선이 있을 것이다. 거기를 갈라보면 내장 가운데쯤에 황색 계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장일정은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가 역해 토할 것 같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연신 소도(小刀)를 움직였다. 그러면서 화관홍선사의 내장을 연신 주물럭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뭉클뭉클한 그 느낌은 부드럽다기보다는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그러던 중 둥그런 물체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사부님! 이, 이거요?"
"오, 그래! 그걸 잘 떼어내거라.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한다."

"예! 알았습니다."
"조심해야한다. 터지면 아무 짝에도 못 쓰니까."

"알겠습니다. 조심할게요."
"떼어 내면 즉각 만년한옥으로 만든 함에 넣어야 한다."
"예! 알았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계란 같은 것의 뒤쪽에는 질긴 힘줄이 여러 가닥 연결되어 있었다. 어찌나 질긴지 여러 번 칼질을 해도 잘 떼어지지 않았다.

장일정이 화관홍선사의 뱃속에 있던 것을 무사히 떼어낸 것은 처음 배를 가른지 무려 한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워낙 조심 조심 힘줄을 떼어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는 내내 조심하라던 북의의 잔소리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하지만 장일정은 그러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작업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이제 다 어…? 사부님! 사부님!"

계란 만한 것을 떼어낸 뒤 만년한옥으로 만든 함에 넣으며 돌아앉던 장일정은 쓰러져 있는 북의를 보고 황급히 다가갔다.

"사부님! 정신 차리세요. 사부님!"

북의의 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보니 걸치고 있는 의복에는 온통 흙투성이였다. 아까는 너무 다급하여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북의의 손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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