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관홍선사로서는 마지막 회광반조 현상이 일었을 때 목숨을 앗아간 원수를 처치한 셈이다. 이럴 즈음 장일정이 나타난 것이다.
그의 침술 덕에 혼절에서 깨어난 북의는 자신의 안위보다는 한시바삐 화관홍선사의 내단을 취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썩어들기 시작하면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여 다짜고짜 그것을 떼어내라 한 것이다. 하여 장일정이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잔소리를 해대던 그는 어느 순간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실 북의는 겉으로 표는 나지 않지만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상태였었다. 화관홍선사와 혈전을 벌이는 동안 서무 세게 조이는 바람에 당한 것이다.
장일정에게 발견될 때처럼 누워 있었다면 조금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그러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내단을 취하는 모습을 모고 싶어 신형을 일으키던 북의는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찌르자 엄청난 통증에 혼절한 것이다. 너무도 엄청난 고통이었기에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혼절하였으나 작업에 열중해 있던 장일정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이, 이런…! 사부님! 사부님!"
맥을 짚던 장일정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사부의 앞섶을 풀어 헤쳤다. 예상대로 그곳은 엉망이었다. 온통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는데 곳곳은 퉁퉁 부어 있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곳이었다.
"으으으음…!"
너무도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장일정으로서는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천하제일의라 할지라도 못 고치는 병이 있는 법이다. 아직 침구술을 완전히 익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탕약만큼은 천하제일의라는 북의와 버금갈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눈앞의 증상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러진 갈비뼈를 즉각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끄르르르르! 끄르르르르…!"
장일정은 들리 듯 말 듯한 사부의 신음에 시선을 돌렸다가 즉각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선혈 때문이었다.
작은 기포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폐에 심각한 손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부러진 뼈가 폐를 찌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신의 경지에 도달한 부술(剖術)의 천재가 오기 전에는 목숨을 구할 방도가 없는 셈이다.
"끄르르르! 저, 정아야…! 끄르르르! 내, 내 푸, 품에… 저, 정아야! 내, 내 말을 듣고 있니?"
"사부님! 흐흑! 사부님! 잘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반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북의는 끊어질 듯 말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가에 귀를 댄 장일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사부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끄르르르! 저, 정아야! 내, 내 품에 이, 있는 것을… 으으으! 너, 너에게 주니… 워, 원수를…"
힘겹게나마 말을 이어가던 북의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자 장일정의 두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정을 주었던 사부가 죽은 것이다.
"사부님! 사부님! 흐흑! 사부님! 제자는 아직 배울 게 많은데 흐흑!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흐흐흑! 사부님! 안 돼요! 가자 마세요. 사부님! 돌아오세요. 흐흐흐흑!"
장일정은 싸늘하게 식기 시작한 북의의 시신을 흔들며 오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부에게 안부를 여쭐 겸 그동안 사숙에게서 배운 침술을 자랑하려던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잠겨 끝없는 오열을 하였다.
태극목장의 식솔들이 늑대 떼의 공격에 비명횡사하여 사고무친(四顧無親)한 신세가 되었을 때 자신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면서 자상하게 가르치던 사부가 죽었으나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며칠 후 대흥안령산맥의 아랫자락 한 곳에 자그마한 봉분이 생겼다. 그 앞에는 공손히 무릎 꿇은 장일정이 있었다.
"사부님! 제자, 반드시 천의장을 멸망시킨 흉수들을 찾아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한은 떨치시고 부디 극락왕생 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봉분의 앞에는 목비가 세워져 있었다.
< 영세제일의(永世第一醫) 목재충지묘(穆在忠之墓)
세상의 한을 모두 떨치고 여기 잠들다.
제자 장일정(張逸晸) 읍립(泣立) >
이날부터 사흘 동안 장일정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봉분을 지켰다. 사부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냥 굶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부가 죽은 이상 이제 사부의 원수는 자신이 갚아야한다. 그렇기에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일어섰다.
"사부님! 반드시 흉수 찾아 원수를 갚을 터이니 이제 편히 쉬십시오. 아셨죠?"
그의 손에는 손때 묻은 한 권의 서책이 있었다. 안에는 북의의 일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천의장 참사 사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말미에는 북명신단을 제련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후에야 왜 사부가 가끔가다 우울해 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고, 엄청난 양의 약초들을 모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부가 모아 둔 약초들은 모두 양(陽)의 기운을 띄고 있는 것이었다. 만년빙극설련실이 지닌 극음지기를 상쇄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부족하였다.
북의가 남긴 서책에는 모아 둔 것의 천 배 이상이 더 있어야 한다 기록되어 있었다. 혼자서 약초를 캔다면 오백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약초를 캐내야 하였기에 반쯤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남의에게 침술을 배우러 간 장일정을 생각하다 문득 사왕곡을 떠올렸다. 수만 마리에 달하는 뱀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독사라 하였다.
그것들의 강한 독성을 이용하면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사왕곡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만 마리에 달하는 뱀을 일일이 잡아 독을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평생 뱀을 잡으며 생활한 땅꾼이 적어도 수천 명은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던 중 이열치열(以熱治熱),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떠올랐다.
독사가 독사를 잡아먹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때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사왕곡에 화관홍선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독단을 만들어 복용하고 호신용으로 검 한 자루만을 가지고 갔던 것이다. 이날 이후 장일정은 사부가 남긴 서책을 읽고 또 읽었다.
북명신단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북의가 남긴 서책에는 미완성인 제련 방법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으읍! 퉤에! 퉤퉤퉤!"
어제부터 이회옥은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찬 오물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였다. 자칫 졸기라도 한다면 입안으로 오물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기랄! 이러다 죽는 건가…?'
까치발을 하고 선 이회옥은 벌써 이틀 째 한숨도 자지 못했다. 며칠 전에 쏟아진 폭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턱까지 차 있던 오물이 단숨에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차 올랐던 것이다.
지난 며칠 간 이회옥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죽은 냉혈살마였다. 그는 턱밑까지 오물이 차 오르자 그때까지의 냉정을 잃고 살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그래서 비접나한처럼 옥졸이 지날 때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때 이회옥은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기에 침울해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역시 그런 처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막연히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 역시 오물에 빠져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비접나한이나 냉혈살마처럼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보았자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옥졸들은 이런 모습이 다소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껏 피거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은 죄수의 수효는 얼추 팔십여 명 정도 되었다. 그 가운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은 죄수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한때나마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마들이거나 죄질이 아주 흉악한 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나이 육십 이하는 아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겨우 열 여섯 살이 된 이회옥이 살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기에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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