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과 북한의 '물귀신 작전'

[김당 기자의 정치 톺아보기 ⑨] '북풍' 시시비비 <2>

등록 2003.03.15 19:03수정 2003.03.1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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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대선 전 북풍은 96년 4월 총선 전 북풍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97년 대선 전 북풍은 사상 유례없는 북한의 '대선 공작반' 운용과, 이를 간파한 안기부 북풍 공작팀의 역이용 공작 그리고 야당 사상 최초로 구성된 북풍 대책팀 등이 97년 10월부터 12월 대선 직전까지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치열한 첩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96년 4월 북풍에서부터 97년 대선 전의 북풍공작·총풍(銃風)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북한 변수'가 결과적으로 일관되게 DJ(김대중)를 선거에서 떨어뜨리려는 '김대중 죽이기'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검찰의 '북풍사건 수사결과' 자료(98. 5)는 97년 대선 전 북풍공작의 실체와 관련해 "북풍사건의 본질은 지난 대선기간중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과 이를 역이용한 안기부의 정치공작이 결합된 사건으로 밝혀졌다"고 결론짓고 있다. 또 검찰은 북한의 대선공작과 구안기부 수뇌부의 북풍 조장 행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96·97 북풍'의 본질은 김대중 낙선 공작

"북한은 남북관계 주도권 장악을 위해 노련한 정치인(DJ)의 당선을 저지하고, 상대하기 쉬운 후보(이인제 혹은 이회창)가 당선되도록 유도한다는 소위 'DJ 불가론'에 입각해 97년 7월경부터 북경에 '통일전선부'와 '국가안전보위부' 합동으로 구성된 '대선 공작반'을 파견하여 직접적인 방법으로 오익제·김병식 명의의 김대중 후보 용공모략 편지를 국내에 우송하거나, 오익제를 평양방송에 출연시켜 음해성 연설을 하도록 해 국내에서 '색깔논쟁'을 유발케 하는 한편 간접적인 방법으로 안기부 대북 공작원·방북 사업가 등을 이용해 김대중 후보가 북한과 모종의 밀약이 있는 양 흘리는 식으로 흑색선전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즉 △ 윤홍준 기자회견 사건 △ 오익제 편지 사건 △ 이석현 의원 명함 사건 △ 한나라당 후보 지원을 위한 안기부 직원들의 귀향활동 등 일련의 북풍공작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에서 드러난 북한의 일관된 흐름은 'DJ 낙선운동'이었다. 검찰은 사상 유례 없는 북풍사건 수사에서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 등 안기부 직원 11명을 안기부법 및 선거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 등 정치인 3명을 남북교류협력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북한은 왜 일관되게 'DJ 낙선운동'을 펼쳤을까? 당시 국민회의 북풍대책팀 소속 한 의원은 <김대중 집권비사>에서 이같은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북한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DJ를 남한체제의 순교자로 만들어왔다. 그런 DJ가 정권을 잡으면 북한 주민들의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자칫 정권의 존립 기반마저 무너질 수도 있다. 북한은 DJ가 친미주의자라고 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잘 알고, 미국과의 사이에 틈이 없다는 점을 경계했다. 북의 기본전략은 한·미 간의 틈새를 이용해 미국과 거래하는 것이다. YS 정권 때는 이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DJ가 되면 이게 어렵다고 본 것이다."

대선 전 북한의 무력 도발설과 총풍

97년 대선 북풍의 마지막 고비는 '북한의 무력 도발설'이었다. 12월14일 국민회의 북풍대책팀은 어마어마한 첩보를 접했다. 첩보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안기부의 한 고위간부가 12월초 베이징을 방문해 북한측 대선공작반에 대선 직전 무력도발을 요청했다. 96년 4·11 총선 때의 판문점 무력시위 같은 것이다. 대선 직전인 12월15일∼17일 사이에 북한군 2∼3개 소대가 휴전선에서 고의로 무력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국민회의 북풍대책팀은 초비상이 걸렸다. 만에 하나 이 첩보가 사실이라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였다. 97년 12월15일 조세형 권한대행이 "선거에 임박해 북한군이 휴전선에서 도발행위를 감행함으로써 이번 대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험극을 벌일 위험성에 대해 우리 당은 북한 당국에 엄중히 경고한다"라고 다소 '느닷없는' 특별경고 성명을 낸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이다.

국민회의측이 접한 첩보와 달리 북한은 선거 기간 '조용히' 넘어갔다. 또 97년 대선 결과가 북한의 대선공작반과 정부(안기부) 여당의 북풍공작팀을 상대로 첩보전을 펼쳐 북풍공작을 막은 국민회의 북풍대책팀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이 무력 도발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다가 98년 10월1일 <동아일보>의 특종보도로 불거져 나온 것이 이른바 '총풍 3인방'의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다.

총풍사건의 핵심은 97년 당시 오정은(청와대 행정관)·장석중(대북 사업가)·한성기(진로그룹 장진호 회장 개인 고문) 3인이 대선후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베이징의 북한 대선공작반 인사들과 만나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총풍사건에 대한 국정원 및 검찰의 이런 수사결과는 재판에서 한나라당 변호인단의 잇단 고문 의혹 제기와 5 차례에 걸친 재판부 기피신청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총격 요청은 했지만 그 배후는 없다?

우선 2000년 12월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배후 없는 자작극'으로 규정했다. 재판부는 사건이 피고인들의 과잉 충성에서 비롯됐지만, 범행 모의와 총격 요청만으로도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라며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측에 무력시위를 요청하고 총격 등의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 홍보하기로 결의했다는 검찰 기소의 골격을 수용한 판결이지만 아무런 배후 없이 엄청난 공작을 꾸몄다는 점이 납득하기 어려웠고, 이 점에서 무리한 '타협적 판결'로 간주되었다.

항소심 판결은 무력시위 요청을 개인의 우발적 돌출발언으로 규정, 음모성을 전면 부인했다.

"97년 12월, 판문점 총격 요청은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총격요청을 하기로 모의한 적은 없었다."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피고인들이 범행을 모의했다는 자백의 임의성과 신빙성을 부정하면서, 돌출발언의 가벌성(可罰性) 자체를 낮게 보았다. 그런 배경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북측과 접촉한 것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법률적 시비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가려질 전망이다. 그러나 그 성격이 돌출성이건 음모성이건 이들이 북한측에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인 그 배후이다. 검찰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3자의 관계는 이렇다.

우선 청와대 오정은 국장은 당시 한나라당 박관용 의원(현 국회의장)의 생질이다. 오씨는 지난 92년 대선 당시 YS 사조직인 나사본에서 대선기획 업무 경험이 있는 청와대 민정비서실 조청래 행정관 등과 이회창 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비선조직을 만들어 한성기씨와 함께 18회에 걸쳐 '대선전략보고서'를 이 후보에게 직접 전달해왔다. 비선 조직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경비는 한성기씨의 주선으로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이 지원했다.

안기부 공작원인 장석중씨는 대북 사업을 하면서 취득한 정보를 안기부에 보고해왔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한 오정은 국장에게도 정보를 제공해왔다. 장씨는 대북 사업을 하면서 북한측이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의 방북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정은씨의 소개로 박관용 의원을 만나 지원을 부탁했으며 박 의원은 당시 안기부·통일원 등에 김순권 박사의 방북을 허가해주도록 지원해왔다.

한편 한성기씨는 평소 알고 지낸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의 주선으로 오정은 국장과 함께 이회창 후보에게 '대선전략보고서'를 전달해왔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작성한 박찬종 의원 동향 보고서 4건을 직접 이 후보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한씨는 한나라당 박찬종 고문이 탈당해 이인제 후보측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이자 이회창 후보가 박고문을 만나 담판할 수 있도록 이 후보와 함께 이 후보의 승용차를 타고 박 고문 자택까지 안내했다. 또 한씨는 장석중과 함께 베이징에 있는 북한측 대선공작반 인사들에게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하러 갔을 때 이회성씨로부터 여비조로 500만원을 받았다.

한나라당의 '물귀신 작전'

이쯤 되면 사실 배후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 안기부 공작원인 장석중씨의 신분과 한성기·오정은씨의 사회적 위치나 비중으로 보아 이들이 독자적으로 총격 요청 범행계획을 모의해 실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오정은·한성기 두 사람이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해오다가 이 후보 당선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가를 얻을 목적으로 총풍사건을 기획한 사실에 비추어 총풍 추진상황을 이 후보 진영에 보고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총풍 3인방은 97년 10월 처음에는 김순권 박사의 방북카드를 대선과 연계시키는 방안, 즉 북한이 간절히 원하는 김 박사의 방북을 선물로 주고 북한의 대선개입(DJ의 통일정책 지지선언, 친북활동 및 북한자금 유입설 유포 등) 이라는 대가를 얻어내는 방안을 추진하다가 김 박사의 대선전 방북이 여의치 않자 97년 11월경부터 판문점 무력시위 요청이라는 극단적 방안을 모의했던 것이다. 그래서 3인방 가운데 오 국장은 통일원에서 김순권 박사의 방북승인을 얻어내고, 장씨는 한성기씨를 북경으로 안내해 북한측 인물과 접촉을 주선하고, 한씨는 북측 인사를 만나 대선 직전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역할을 분담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들의 진술조서 등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97년 12월10일∼12일 동안 베이징 캠핀스키호텔에서 북한측 인사들을 만나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 특별보좌역 한성기'라고 인쇄된 명함을 건네면서 DJ의 친북활동 자료 제공 등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12월14∼15일에 TV 화면이 잘 잡히는 판문점에서 지난 4·11 총선 때처럼 무장군인들이 왔다갔다하면서 무력시위를 해 긴장을 조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이들은 "무력시위 요청을 들어준다면 김순권 박사를 12월20일까지 북에 보내주고 신정부 출범 전까지 비료, 영농자재 등을 지원해주겠다"는 등 북한측에 무력시위의 대가를 제공해주겠다고 제의했다.

총풍사건은 '이회창 죽이기'?

안기부와 검찰은 당시 이 사건을 인지해 수사할 때만 해도 처음에는 대북통인 박관용 의원을 유력한 배후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다 수사과정에서 한성기씨와 이회성씨의 커넥션이 드러남에 따라 이회창 후보도 사전 혹은 사후에 보고받았을 것으로 보고 수사의 초점을 이회성씨에 맞추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이 3인방이 당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엄호성·홍준표 등 법조계 출신 소속 의원들을 대거 이들의 변호인단으로 내세워 이들의 진술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는 쪽으로 몰아갔다. 피의자 진술조서를 보면 이들은 사건 초기만 해도 순순히 범행 모의사실을 자백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변호인단의 면회 이후에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며 이를 전면 부인했다. 아울러 이들은 공판과정에서는 "당시 국민회의측이 북풍을 막는 과정에서 북한측에 이번 대선에 개입하지 않는 대가로 대선후 대북 지원을 약속했다"며 이른바 국민회의측의 북풍 역공작을 폭로하는 '물귀신 작전'을 구사해 왔다.

총풍 사건의 일방인 북한 당국의 태도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다. 북한 당국은 총풍 사건을 둘러싸고 여야가 정치 공방을 벌일 때도 성명을 내어 "우리의 입이 터질 때는 여든 야든 다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입을 열면 이회창을 비롯한 한나라당 패거리들에게 좋을 것이란 하나도 없다"며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다치게 된다는 식으로 '협박'한 바 있다.

이런 '협박'은 최근 현대의 대북송금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과 한나라당의 특검법안 통과를 계기로 다시 재현되었다. 지난 3월10일 북측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김용순 위원장)가 이례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보'를 발표한 것은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국민의 정부 출현 이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고위급접촉을 제안하면서 자기들의 청원을 들어준다면 수백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특히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우리측에 밀사를 보내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면 현 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통이 큰 대북지원을 할 것을 담보했다."

그러면서도 북측은 "한나라당의 밀사 파견 문제는 북남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여 현재로서 그 비밀을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여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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