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측은하다는 표정을 짓던 무영혈편은 안색을 굳혔다.
"흐음! 오늘 너를 오라고 한 것은 네게 물을 것이 있어서이다. 광마는 분명히 철마당에서도 두 손을 든 미친 말이었다. 그런 놈을 한 달만에 길들였다고? 무슨 묘수라도 있었던 게냐?"
"예! 사실 그 망아지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안장에…"
이회옥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무림천자성에서 광마라 불리던 망아지는 비황(飛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같은 배에서 나온 또 다른 망아지는 비봉(飛鳳)이라고 불렸다. 전설의 신조(神鳥)인 봉황(鳳凰)에서 이름을 땄는데 봉(鳳)은 수컷이고, 황(凰)은 암컷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될성부른 잎은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둘 다 다른 망아지에 비하여 월등한 자질이 엿보였다. 하여 비봉은 성주인 철룡화존의 애마로 결정되어 조련되었고, 비황은 소성주인 철기린의 애마로 내정되어 있었다.
만일 비황이 광마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았고, 비룡(飛龍)이라는 탁월한 존재가 없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타기만 하면 미친 듯이 날 뛰는 비황을 어떻게든 조련시키려고 애를 쓸 때 대완구 한 마리가 철마당으로 보내졌다. 멀리 산해관 무천장에서 보내온 것으로 비룡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놈은 길들여지지 않은 듯 사납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침 시찰을 나왔던 철룡화존은 미쳐서 날뛰는 광마보다는 차라리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났겠다며 비룡을 철기린의 애마로 지정하였다. 덕분에 비천혈영이 비황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비룡을 길들이려던 철마당의 조련사들은 낭패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길들이려 하여도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제일향에 있던 조련사들 여럿이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자 누구도 비룡을 맡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비룡을 철마당으로 보낸 장본인은 제일호법인 무영혈편이었다. 그는 산해관 무천장의 부장주인 혈면귀수로부터 비룡을 선물로 받은 것을 철마당에 보내 조련토록 한 것이다.
마침 그때는 중원에 더 이상의 대완구는 없다고 자부하던 때였다. 수년 전, 철마당주와 철검당주가 어디선가 천리준구 일천이백여 마리를 끌고 온 것이 중원에 있던 대완구 전부라 하였다.
그렇기에 누구든 대완구를 포획하여 총단으로 보내면 일 계급 특진을 시켜주던 때였다. 순수한 혈통을 지닌 대완구는 더 이상은 없다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무영혈편은 성규(城規)에 의거하여 혈면귀수를 부장주에서 장주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동안 산해관 무천장에 관해서 좋지 않은 보고가 여러 번 올라 왔기에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이다.
사면호협이 정정당당한 성품으로 매사를 사심 없이 처리한다는 것을 아는 수뇌부가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단 한번도 상납하지 않자 너무 고지식하다면서 간혹 문제점을 지적하곤 하였다.
이렇듯 수뇌부들의 눈밖에 났다면 이번 기회에 정신을 차리도록 해야 한다 생각하여 그런 인사조치를 취한 것이다. 아무튼 비룡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인생에 초가 쳐진 셈이다.
"흐음! 그으래…?"
무영혈편은 비황을 어떻게 길들였는지를 듣고 이회옥을 다시 보았다. 말이 미쳤다고 생각하면 말만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말을 내버려두고 안장을 볼 생각을 하였다면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사려가 깊다 생각한 것이다.
"좋아! 네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겠다. 철마당주에게 가서 비룡이라는 말을 조련하도록 명(命) 받았다고 해라. 장차 소성주께서 타실 말이니 각별히 주의를 하여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허리 숙여 대답하는 이회옥은 산해관에서 헤어진 비룡을 떠올렸다. 어미가 낳자마자 자신이 맡기 시작하여 어엿한 명마로 성장될 즈음에 헤어진 말이다. 그리고 얼굴에 있는 흰 점 때문에 재수 없다며 도살될 뻔하였던 말이기도 하다.
'비룡이라고…? 흐음! 보고 싶구나.'
어릴 적 함께 뛰놀던 장일정을 제외하고는 친구조차 없던 이회옥이었다. 그렇기에 유난히 비룡에게 많은 정을 주었다. 따라서 비룡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생각나는 것이었다.
"잘하면 상이 내려질 것이나 못하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좋아, 그럼 물러가도록 해라."
"존명!"
공손히 고개 숙여 대답한 이회옥은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무영혈편이 있는 전각에서 나온 그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철마당 조련사들이 말하길 제일호법의 성격이 급하니 각별히 행동에 주의하지 않으면 박살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여 너무 긴장했던 때문이다.
그래서 같이 있는 동안 고개를 들어보지 못한 것은 물론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여 방금 만나고 나왔건만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비룡이라고? 으음! 하필이면 왜 그 이름이지?"
나직이 중얼거리며 내원을 나선 이회옥은 곧바로 되돌아가 철마당주에게 공손히 패를 내밀었다.
"당주님! 제일호법께서 소인에게 비룡이라는 말을 돌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뭐라고? 네게 비룡을 돌보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그렇습니다."
"흐으음! 그으래…? 호법께서 어찌 네게 그런 막중한 일을 맡기셨는지 알 수가 없구나."
뇌흔은 흑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룡이 어떤 말이던가! 장차 천하를 다스릴 무림천자성의 성주가 될 철기린 구신혁이 타고 다닐 말이다.
철마당의 노련한 조련사들조차 조롱거리가 되기 싫다면서 맡기를 꺼려하지만 어찌 되었건 순수 대완구 혈통을 이어 받은 말이 분명하고 장차 명마가 될 소지가 다분한 말이다. 그런 말을 이제 겨우 열여섯 먹은 소년에게 맡긴다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던 것이다.
실력이 검증된 철마당의 노련한 조련사들조차 손들 정도로 아주 애를 먹이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회옥이 비황을 한 달만에 길들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운이 좋아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요행히 그랬다면 비룡을 길들이기는커녕 아예 망쳐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뇌흔은 비록 제일호법의 명으로 이회옥이 비룡을 돌보게 되겠지만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늘같은 제일호법이 직접 명을 내렸다는데 이를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당장 항명죄(抗命罪)로 다스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으음! 네게 비룡을 돌보라 하셨다고…?"
이회옥은 뇌흔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눈치로 보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기에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선친인 이정기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 정말 확실하다 할지라도 한번쯤은 곰곰이 따져보는 자세를 가지라 하였다. 아직 비룡을 보지도 못한 이상 가타부타를 왈가왈부할 수 없기에 가만히 있는 것이다.
"으으음! 호법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라면 그리해야겠지. 좋아, 네게 비룡을 맡기겠다. 대신 한 가지 약조를 해야겠다."
"약조요?"
"그래! 네가 말을 잘 돌본다고는 하지만 본좌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네 실력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당분간은 매일 매일 보고를 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회옥은 내심 웃음이 나왔다. 명색이 태극목장 제일목부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따라서 말 다루는 기술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뇌흔의 노파심이 웃겼던 것이다.
"좋아! 본좌를 따라 오너라."
"예!"
잠시 후 이회옥은 철마당주 집무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마굿간에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반가움의 빛이 그득하였다. 일 년이 넘도록 보지 못했지만 분명 자신의 애마인 비룡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흑! 용아…!"
히히힝! 히히히히히히힝!
비룡도 반갑기는 마찬가지인 듯하였다. 지금껏 어느 누구든 닿기만 하면 물어뜯을 듯 달려들거나 뒷발질을 하였다. 그러나 이회옥은 열외였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비룡은 단번에 알아봤다. 그렇기에 다가서자마자 얼굴을 부비면서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뇌흔은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마침 다른 마굿간에서 새끼를 낳으려 한다는 전갈을 받고 그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흑! 용아,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
반가움에 와락 눈물을 쏟은 이회옥은 하염없이 비룡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참으로 감격적인 해후였다.
오래 전 비룡를 팔겠다고 산해관 무천장을 찾았을 때 혈면귀수는 비룡이 명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흰 점 때문에 흉마처럼 보이나 자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었지만 적어도 무천장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랬다가는 즉각 처벌받기 때문이다. 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하여 적어도 산해관의 어느 누구도 비룡을 사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팔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비룡을 탐낸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말 한 마리 때문에 지금껏 이뤄 놓은 모든 기반을 잃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만큼 무천장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다.
이후 이회옥이 청룡무관에 머물면서 무공을 연마하는 동안 혈면귀수는 수시로 안을 살폈다. 비룡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살핀 것이다. 그러다가 완전히 다 자랐다 싶자 태수를 구워삶았다.
은자 이만 냥은 아무런 죄도 없는 이회옥을 말 도둑으로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회옥을 지옥갱으로 보내도록 조치를 취했다. 혹시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까 싶어 관아의 뇌옥에 하옥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아들로 하여금 은자 오백만 냥과 비룡을 끌고 제일호법을 찾도록 하였다. 현재로선 성주 일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일호법은 아무나 만나주지 않는다. 하여 그를 만나기까지 든 은자만 해도 삼십만 냥에 달했다. 중간에 다리를 놓아준 인물들이 한결 같이 금품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무사히 제일호법을 만난 혈면귀수의 아들은 남은 은자와 비룡을 바쳤다. 그리고 승차(陞差)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고 돌아갔던 것이다. 비룡 때문에 운 사람이 이회옥과 사면호협이라면 웃은 사람은 비영혈편과 혈면귀수인 셈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