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74

북명신단 (4)

등록 2003.03.13 23:56수정 2003.03.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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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일향 소속 조련사들 가운데 춘홍이를 노린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워낙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춘홍이 몸담고 있는 화월루는 무한에서도 제법 알려진 기루였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인기 있는 기녀였다.

병든 노모의 약 값을 대기 위하여 스스로 기원을 찾았던 그녀는 노모가 죽자 누구든 자신을 기적에서 빼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공언하였다. 하여 수많은 사내들이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를 기적에서 빼내는 대가인 은자 이백 냥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무천장 수문위사의 보수가 한 달에 닷 냥이었다. 이백 냥이라면 안 먹고 안 써도 삼 년 이상을 꼬박 모아야 하는 거금이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비천혈영이 은자 이백 냥을 상금으로 걸었기에 제일향 소속 조련사들은 광마를 길들이려고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비천혈영이 지옥갱으로 떠날 때까지 광마는 끝내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제일향 소속 조련사들은 무능력한 자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하였다. 언제나 자신들이 최고라고 거들먹거리다가 코가 납작해 진 것이다.

화월루의 춘홍이를 차지한 운 좋은 사내는 제이향 소속 조련사인 장홍(張洪)이라는 자였다. 나이 삼십이 넘도록 혼례를 올리지 못한 노총각이었던 그는 모아 두었던 은자를 모두 꺼내들고 도박장을 찾았다.

그날 그는 은자 삼백 냥을 땄다. 그래서 춘홍이의 임자가 된 것이다. 그녀를 기적에서 빼 오던 날 장한은 속이 쓰려 미칠 지경이었다. 하여 대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었다.


만일 안장에 박혀 있던 바늘만 뽑아냈다면 그토록 탐내던 춘홍이는 자신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탓하고 있느라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제기랄…! 제기랄! 그때 그걸 알았다면… 젠장! 젠장!"


연신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장한을 본 이회옥은 어림도 없다는 듯 혀를 쑥 내밀었다. 피거형에 처해져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자신이 구사일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바늘 박힌 안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기에 혀를 내민 것이다.

장한이 사라진 후 여느 날처럼 말똥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마굿간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이봐! 네가 이회옥이라는 놈이냐?"
"엇! 당주님! 속하 이회옥이 인사드립니다."

들어선 사람은 놀랍게도 철마당 당주인 뇌흔(雷欣)이었다. 철마당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당주와 대면한 적은 없었다. 그저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기에 아는 것이다.

회삼(灰衫)을 걸치고 있는 그의 좌측 가슴에는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황금빛 장검이 자색 구름을 뚫고 있는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습관인 듯 보기 좋게 다듬어진 시커먼 수염을 연신 쓰다듬던 뇌흔은 이회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한 번은 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회옥은 올해 열 여섯이라 하였다.

뇌흔이 보기엔 아직 어린 애였다. 그렇기에 어디서든 자신과 마주칠 일이 없다 생각한 것이다.

"흐음! 이마를 보니 맞군! 제일호법께서 찾으시니 어서 가 보도록! 참, 네가 정말 광마를 길들였느냐?"

뇌흔은 이회옥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자형의 흔적을 보고 제대로 찾았다고 확신하였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흐음! 재주가 좋구나."
"가, 감사합니다."

뇌흔은 제일향 소속 조련사들 모두가 포기한 광마를 불과 한 달만에 길들였다는 소리를 믿지 않았었다. 그만큼 제일향 소속 조련사들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졸개를 시켜도 되나 일부러 찾아 온 것이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 그렇게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흐음! 이 패를 가지고 가면 내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안에 가서 제일호법께서 찾으셨다고 하면 안내해 줄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이회옥은 뇌흔이 내미는 철패를 받아들었다. 거기엔 철마당이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었다.

무림천자성은 크게 나눠 내원과 외원, 그리고 별원으로 나뉘어 있다. 내원은 호법과 장로, 그리고 순찰원주 등 수뇌부들과 식솔들이 머무는 곳이고, 별원은 성주 일가가 머무는 곳이다.

외원은 무림천자성의 성문만 넘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성문에서 철저하게 신분을 조사하기 때문이다.

내원은 신분을 증명하는 패가 없으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곳이다. 설사 패가 있다 하더라도 명확한 용무 없이 내원에 발을 들여놓으면 즉각 집법당(執法堂)으로 끌려가 박살이 난다.

별원의 경우에는 더하다. 신분을 증명하는 패가 있다 하더라도 성주일가가 아니면 아무도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일 이를 어기면 즉각 참수형에 처해지는 곳이 별원이었다.

다시 말해 별원은 성주 일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금지인 셈이다. 물론 내원과 외원 모두 시중을 드는 시비들이나 하인들은 예외였다.

뇌흔이 건넨 것은 철마당주의 신패였다. 내원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당주급 이상의 신패가 있어야 하기에 건넨 것이다.

오늘 이회옥이 내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갔다 오는 즉시 이 신패를 본좌에게 가져오너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좋아, 호법께서 기다리시니 어서 다녀오도록!"
"존명!"

이회옥은 절도 있게 허리를 숙인 후 내원으로 향하였다.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것은 높이 십 장의 또 다른 성곽이었다. 성곽 속에 또 성곽이 있는 것이다. 입구에서 철마당주의 신패를 보였건만 수문위사들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적어도 철마당에서 당주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내원에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내원에 드나들 자격을 지닌 최하직급이 당주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물어 물어 당도한 곳에는 한마디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전각들이 무리 지어 있는 장원이었다. 놀랍게도 내원에는 장원군들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오! 네가 이회옥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무림천자성 제일호법은 철마당의 당주인 뇌흔조차 고개를 바로 들어 바라볼 수 없는 지고무상한 신분이었다. 그렇기에 이회옥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광마를 길들였다는 소식은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다."
"……!"

이회옥은 칭찬인지 아닌지 구분이 모호한 소리였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고 촐싹거리면서 어쩌고저쩌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에 그저 감격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한편 무영혈편 조경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불과 열 여섯으로 보이는 이회옥이 지옥갱 출신이라는 것은 그의 이마에 새겨진 흉측한 흉터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막내인 비천혈영으로부터 날아든 서찰을 보았을 때 분명 지옥갱에 일년 이상 하옥되어 있었으며, 탈출하다 생포되어 피거형에 처해졌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열 다섯이거나 그 이전에 하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하였다.

사실 지옥갱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이 불가능하다 판단되거나 죄질이 극악무도한 자들만 가두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하들로 하여금 알아보게 한 바에 의하면 산해관에서 말을 한 마리 훔친 죄라 하였다.

살인이나 강도도 아닌 절도죄로 지옥갱에 보낸 예는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 그것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신투(神偸)도 아닌 초범 소년을 지옥갱에 보낸 예는 더더욱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알아보았으나 당시 이회옥을 심문하였던 태수는 사건 이후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어디론가 잠적했다 하였다. 따라서 사건을 더 이상 파헤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영혈편은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무림천자성의 제일호법이라는 자리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 자리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문득 그 생각이 났다.

"흐음! 네게 물을 것이 있구나."
"예에? 무, 무엇을 하문(下問)하시려는지…?"

"말을 훔쳐 지옥갱에 하옥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이더냐?"
"아, 아닙니다. 소인은 말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요."

"허허! 이제 굳이 감추지 않아도 된다. 어린 시절 잘못할 수도 있는 법. 살면서 다시 그 같은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
"아, 아닙니다요. 소인은 정말 말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요."

완강하게 부정하자 무영혈편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법이다. 따라서 태수의 실수로 이회옥이 누명을 써서 지옥갱에 갈 수도 있다.

본인으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걸 따진다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자자형에 처해졌고, 일년간 중노동에 시달렸으며, 피거형까지 경험했다. 그걸 되돌릴 방법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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