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판소리 보존회 보성지회장 장장수씨가 심청가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오창석
임권택 감독이 만든 또 하나의 작가주의 영화가 예외 없이 적당한 기간 상영되다가, 당시 여러모로 척박한 이땅의 영화풍토에 던져진 적은 파문이나 얄팍한 눈물 한 방울에 자족하고 넘어가는 게 아닐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케케묵은 소재를 담은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사(映畵史)의 갖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영화사적 의미를 넘어 '문화적 사건'이 되었다.
뱀의 '발'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던 판소리가 '서편제'의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나 과거에서 현재로 걸어나온 셈이었다.
테크노, 뽕짝 등을 음악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던 이들에게는 '내 의식의 심연을 뒤흔드는 이 소리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스스로의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서편제의 고향은 전남 보성으로서 그 비조(鼻祖)인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은 전북 순창 사람이다. 그는 본래 동편제 가락인 우조(羽調,씩씩한 가락)소리를 배웠으나 18세 때 온 집안이 보성으로 옮겨온 뒤 이 지역에 전해 오던 계면(조界面調, 슬픈가락)의 창법을 익히면서 현재의 서편제라 불리게 되는 소리의 형식을 만들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마마를 앓아 얼굴이 얽은 데다, 놀다 넘어져 한쪽 눈을 잃은 험상한 외모였으나 타고난 목청과 노력으로 25세 때인 1860년에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어전(御前)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서 '강산江山'이란 호를 받고 무과의 선달이라는 첩지까지 받는 등 일세를 풍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