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06

이름에 얽힌 비밀 (1)

등록 2003.04.15 12:25수정 2003.04.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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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름에 얽힌 비밀


'으음! 이럴 수가… 이게 무림천자성의 본 모습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버지께서 잘못 아실 리가 없어. 지금은 뭔가가 잘못 돌아가는 거야. 대체 왜 이러지?'


이회옥은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지상최고의 선(善)이라 여기던 무림천자성의 위상 때문이다.

아버지는 태극목장의 목장주가 되는 것보다 무림천자성의 일개 목부가 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한번쯤은 무림천자성에 몸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하여 처음 무림천자성 철마당 제일향에 배속되었을 때 남몰래 감격의 눈물을 흘렸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날 밤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부친의 음덕(陰德)에 감사한다고 수없이 절을 했었다.

저승에 간 부친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찌 아무도 풀어준 적이 없는 지옥갱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그야말로 충심을 다하여 매사에 임했다. 자랑스런 무림천자성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너무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기린을 만나 이곳 선무분타의 순찰이 되는 엄청난 행운을 맞이하였을 때에는 기뻐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었다.


그날은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무림천자성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리라고 스스로 다짐까지 했었다.

그런데 오늘 분타주를 보니 뭔가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자꾸 혼란에 빠졌는데 오늘은 가장 심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홍여진에게 망신을 당하고 돌아온 이후 분타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집무실 앞에서 항의 농성을 하고 있는 선무곡 사람들을 당장 해산시키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이에 선무곡에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농성자들을 강제 해산토록 하였다. 어떠한 일이 발생되더라도 무림천자성의 분타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지위 협정서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되었다. 일부 무리들이 무림천자성에 충성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과잉 진압을 한 탓이었다.

그날 저녁 분타주를 비롯한 수뇌들과 술자리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다향루 이야기가 나왔고 모두가 분개해 하였다. 어찌 보복할 것인지가 화제에 오를 법도 하였건만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술과 여인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술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여인들은 하나같이 미색이 빼어났다. 이회옥의 곁에도 그 중 하나가 앉아 시중을 들어 주었다.

술이 들어가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술잔을 돌리며 흥청망청하더니 하나 둘 시중 들어주던 여인들을 끼고 사라졌다.

이경 무렵이 되자 실내에는 제법 술이 오른 이회옥과 그의 곁에서 시중 들어주던 여인만 남게 되었다.

"핫핫! 낭자는 보기 드문 미인이시구려. 헌데 어느 기원 소속이시오? 핫핫! 어딘지 알아야 다음에라도 찾아갈 것 아니오?"
"어머, 기원이라니요? 소녀는 기원 소속의 기녀가 아니에요."

"엥? 그런데 여기 와서 술을 따른단 말이오?"
"흑! 그건 사정이…"

"핫핫! 좋은 술자리에서 웬 눈물이오? 좋소!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이야기나 한번 들어 봅시다. 혹시 아오? 소생이 낭자의 근심을 덜어 줄지? 핫핫! 그러니 어서 이야기 해보시오."

술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여러 종류이다.

약간만 마셨을 때에는 약이 되고, 조금 더 마시면 용기를 부여하는 묘약이 된다. 여기에서 더 많이 마시면 없던 호기도 부리게 하고, 취하도록 마시면 만용을 저지르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아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도록 마시면 단 한번의 실수로도 패가망신(敗家亡身)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술이다.

이회옥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분타주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적당히 취기가 올랐기 때문이었다.

괜스레 호기가 솟은 것이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무림천자성의 위대함을 들먹이면서 건배(乾杯)를 외친 결과였다.

"휴우! 소녀는 어미가 병석에 누워있었으나 워낙 빈한하여…"

이회옥의 말에 잠시 멈칫거리던 여인은 긴 한숨을 시작으로 길고 긴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결코 기녀가 아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랑하는 정인과 함께 백년해로(百年偕老)할 것을 꿈꾸던 평범한 소녀였다. 가난 때문에 기원의 주방에서 허드레 일을 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 때문이었다. 일찍이 청상과부가 된 모친은 재가(再嫁)를 하지 않았다.

끼니를 벌어줄 가장이 없기에 먹고살기 위하여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였다. 마땅한 재산이나 밑천이 없었기에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원인 모를 급병(急病)을 얻어 덜컥 병석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고, 발가락이 썩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여인은 의원을 불렀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였다. 이 의원 저 의원을 다 불러도 모두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하여 비싼 줄 알면서도 선무곡 최고의 의원을 불렀다.

진맥을 마친 의원은 적지 않은 은자를 요구하였다. 워낙 비싼 약재가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모친이 죽을 것이라는 의원의 말에 놀란 소녀는 백방으로 은자를 구해보려 하였으나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었다. 불행히도 일가친척 하나 없었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찾아간 곳은 왜문에서 세운 전장(錢場)이었다. 그곳은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고리의 이자를 받고 은자를 빌려주는 곳이었다. 아무런 담보도 없었지만 사정을 이야기하며 읍소(泣訴)한 결과 열 냥을 빌릴 수 있었다.

덕분에 모친의 병세는 나날이 차도를 보이는 듯싶었다. 이런 가운데 하루하루 날짜 흘러갔고 급기야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었다. 한 달만 쓰기로 하고 은자를 빌렸는데 약속했던 날이 다가오도록 갚을 은자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여인은 은자를 빌릴 때 십 할 이자를 주기로 했었다. 열 냥을 빌렸으니 한 달 후에는 이자 열 냥을 합쳐 이십 냥을 갚기로 한 것이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끼리 은자를 빌려주고 빌려 받을 때에는 일 푼이나 이 푼 정도가 보통이었다. 따라서 거의 백 배에 달하는 엄청난 고리이자였지만 워낙 급했기에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하긴 모친이 당장 죽는다는데 어찌 이것저것을 따졌겠는가!

한 달이 되던 날 여인은 개 끌리듯 끌려갔다. 그날 그녀는 새로운 차용증을 작성하여야 하였다.

다음달까지 은자를 갚는데 원금 이십 냥에 대한 이자로 이십 할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 달 후에는 원금과 이자를 합해 육십 냥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두 달만에 원금의 여섯 배를 갚으라는 것이다. 만일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다음 날부터는 이자율이 사십 할로 뛰었다. 육십 냥에 이자만 이백사십 냥이 붙어 도합 삼백 냥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열 냥이 불과 석 달만에 삼십 배로 불어난 것이다. 빈한한 살림에 어찌 그것을 갚을 능력이 있었겠는가?

결국 여인은 또 다시 왜문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쓴 그녀는 어찌된 영문인지 무림천자성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무참하게 능욕 당해 버렸다.

꿈 많던 선무곡의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짓밟혀진 것이다. 그것은 그 날뿐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정의수호대원이나 심지어는 무림천자성의 하인들에게까지 몸을 내주어야 하였다.

아파도 술자리에 불려나가 술을 따라야 하였고, 원하기만 하면 옷고름을 풀어야 하였던 것이다.

더 이상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어 시름시름 앓던 모친이 세상을 뜨던 날에도 그녀는 술을 따랐고 사내들을 받아야 하였다.

그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었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은자를 빌렸던 것 자체가 잘못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묵묵히 모든 것을 감내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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