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09

이름에 얽힌 비밀 (4)

등록 2003.04.18 12:29수정 2003.04.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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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 사(四) 편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는 성들을 쭉 열거되어 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돈성(敦城)까지였다는 대목이네."

"예에…? 돈성이요? 그건 곤륜산(崑崙山)과 천산산맥(天山山脈)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청해성과 신강성의 끝이 맞물린 곳에 있는 돈황(敦煌)이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인데요?"


"허허! 잘 아는군. 맞네 돈성이 바로 그 돈성이네 그러니 고구려의 영토가 얼마나 넓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는가?"
"우와…!"

이회옥은 노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근거문헌까지 정확하게 집어내며 설명하는데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핫핫! 고구려가 생각보다 넓었지?"
"예! 헌데 왜 소생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지요?"

"허허! 믿어지지 않겠지만 자네의 몸에 대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지."
"예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 선친의 성명은 이정기이고, 자네는 이회옥이네. 이 이름에 대하여 뭔가 알고 있는 사실은 없는가?"
"이름에 대하여 알고 있는 거요? 어, 없는데요?"


이회옥의 표정을 잠깐 살핀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네 선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군."
"……?"


이회옥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빛을 빛냈다.

"자네 부자는 매년 팔 월이 되면 제사를 지냈을 것이네."
"어!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허허! 다 아는 수가 있지. 그 제사가 누구를 위한 제사였는지는 알고 있는가?"
"소, 소생의 할아버지 제사라고 들었는데요?"

"허허! 자네 친조부의 제사인줄 알았지?"
"예? 그, 그럼 아닌가요?"

"허허! 아니지. 아암! 아니고 말고. 분명 아닐 것이네."
"예? 그게 무슨…?"

이회옥은 갑작스럽게 혼란스러웠다. 노인의 말대로 매년 팔 월이 되면 가장 정갈한 의복을 갖춰 입고 제사를 지냈다.

제례(祭禮)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시제(時祭)라 하여 고조 이하의 조상을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 있다. 일년에 한번 이상 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제사로 여겨졌다.

선조들에 대한 제사에는 초조(初祖 :시조)와 그 이후 오 대까지 여러 선조에 대한 제사로 나뉜다. 시조에 대한 제사는 매년 동지(冬至)에 거행하고, 다른 제사는 매년 입춘(立春)에 행한다.

계추제(季秋祭)라고도 하는 이제는 사망한 부모를 위한 제사로 매년 구 월에 거행된다. 만물이 이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기제(忌祭)는 고인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기제의 봉사대상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대조까지였다.

묘제(墓祭)는 산소로 직접 찾아가 올리는 제사이다. 한식(寒食) 때 행하게 된다.

차례(茶禮)는 간소하게 지내는 제사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명절이나 조상의 생신 날에 지내는 제사이다.

사실 어린 시절 이회옥은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외가(外家)에서는 시제를 시작으로 모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매년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가(親家)에서는 연중 단 한번 팔 월에만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면 의례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마련이다. 어른들이야 돌아간 조상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숙연할지 어떨지 모르지만 아이들로서는 제삿날이 잔칫날이나 다름없다.

평상시 좀처럼 먹어볼 수 없는 여러 기름진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삿날이 좀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 아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어느 날, 이회옥은 왜 친가는 일년에 한번만 제사 지내느냐고 물은 바가 있었다.

이에 이정기는 조금 더 성장하면 가르쳐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그 대답은 듣지 못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왜 한번만 지내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자네의 이름이 이회옥이라면 자네 조부의 성명 또한 이회옥이었을 것이네. 그리고 고조부도 같았을 것이네. 대신 자네의 부친과 증조부는 이정기라는 성명으로 불렸을 것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소생 집안 사람들은 모두 이정기와 이회옥 이 둘 중 하나였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그렇네. 자네 집안의 사람 가운데 대를 이을 장자(長子)들은 두 가지 성명 중 하나밖에 사용할 수 없었네."
"에이, 말도 안 되요. 이름이 두 가지 밖에 없는 집안이라니요? 하하하!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름이 같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삼대(三代)가 같이 있으면 아버지가 자기 아들도 못 부르게 되잖아요?"

이회옥은 만일 부친인 이정기가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이 혼례를 올렸다면, 그래서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에게 이정기라는 이름밖에 붙여줄 수 없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자식을 부르려면 천상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곁에 부친이 있으면 어찌 함부로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스치자 이회옥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허허! 그런 불편함이야 있었겠지. 어찌 자식된 도리로 아비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었겠는가. 허허허!"

노인 역시 이회옥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하하하하! 웃기죠? 웃기잖아요."
"허허허! 그래 웃기다. 하지만 노부의 말은 사실일 것이네."
"예에…? 그럼 정말 그랬다는 말인가요?"

한번도 부친에게서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친이 세상을 뜬 이상 이제 확인해볼 도리조차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인의 말은 신뢰가 갔다. 그렇기에 정색을 하며 반문한 것이다.

"자네 이정기(李正己)라는 분을 아는가?"
"에이, 그건 우리 아버지 이름이잖아요. 아참, 노인장의 말씀대로라면 증조할아버지도 그 이름이었나?"

"허허! 헛갈리겠군. 좋네. 지금부터 노부의 말을 잘 들어보게. 아까 고구려 유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예!"

"고구려가 망한 뒤 육십 년이 조금 지났을 때 산동성에 터전을 잡고 있던 고구려 유민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네."
노인의 말에 이회옥은 뭔가를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이정기였나요?"
"아니네. 그 아이의 이름은 자네와 같은 이회옥이었네."

"……!"
"이정기는 하마터면 당나라를 멸망시킬 뻔한 사람이었는데 들어 보았는가?"

"아니요. 못 들어 보았습니다."
"흐음! 그럼 잘 들어보게. 오래 전에…"

이회옥은 자신과 똑같은 성명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빛을 빛내며 귀 기울였다.

뱃속에서는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고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속도 쓰렸지만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런 것은 모두 잊고 온 신경을 귀에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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