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의 손이 아름다운 이유

아름다운 수지

등록 2003.04.22 06:31수정 2003.04.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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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는 우리 반 반장입니다. 수지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저는 수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수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시를 쓰나? 아, 이렇게 쓰면 되겠다. 나는 한 번도 수지의 메일을 받아보지 못했노라!"

수지는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입가에 웃음을 띄우더니 이내 표정이 바뀌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죄송해요. 그런데 당분간은 메일을 못 보내드릴 것 같아요. 학원 끝나고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집에 가면 너무 피곤해서 메일을 열어보지도 못해요."

알고 보니 수지의 귀가 시간은 그날 하루 분의 시간이 이미 초과된 새벽 1시경이었습니다. 학기초 면담을 통해서 수지가 실업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능반에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독서실로 가서 공부를 한다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건강이 걱정되기도 해서 이렇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엄마 등살에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예. 잠이 좀 부족해요."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다음날 수지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컴퓨터에 찍힌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짧은 편지에 답장은 길게 썼습니다. "네가 한 줄 쓰면 내가 열 줄 쓰마" 하고 미리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긴 답장이 오히려 수지의 잠을 빼앗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답장을 쓰지 말까 하다가(답장을 보내면 또 편지를 써야하니까)도 혹시라도 메일을 열어보고 실망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다시 글을 올려놓곤 했습니다.


수지에게서 온 첫 메일은 딱히 할 말이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쓴 편지 같아 보였습니다. 첫 편지가 대체로 내용이 부실한 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진실의 통로를 갖기까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사실은 그런 진실의 통로를 마련해주려는 것이 아이들과 메일을 주고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거라. 왜 공부를 하는지.. 사실 공부를 하는 이유를 물으면 이렇다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 무슨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공부를 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야. 그래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아. 선생님은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 하지만 그냥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사가 되느냐가 중요했단다. (…)'


a 소풍날 나로도 바닷가에서(오른 쪽이 수지)

소풍날 나로도 바닷가에서(오른 쪽이 수지) ⓒ 안준철

'선생님 메일 잘 읽어보았어요,, 저한테 많은 도움이 될 듯 싶어요,,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을 못 해봤어요. 아직 그 꿈이 제게 맞는 건지 엄마가 원하는 건지 아님 제가 원하는 건지,,,제가 큰딸이어서 그런지 엄마에게 부담가지 않게 하려고 노력도 많이 하구요^-^ 제가 원하는 꿈은 간호사예요,, 간호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픈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저만의 생각이기도 하구요.(…)'

'너의 꿈이 간호사라니 왠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간호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구나. 선생님은 두 분 부모님을 모두 일찍 여의었단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다음 해 아버지가 당뇨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셨을 때 아는 분이 아버지를 간호를 해주셨는데 그분 하신 말씀이 이랬어. 간호사라는 직업이 참 깨끗하고 좋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게 지저분하고 힘든 직업일 수가 없다고 말이야. 누가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다고.

난 생각이 달랐단다. 사람들이 간호사를 일컬어 백의의 천사니 순결한 나이팅게일이니 하고 겉모습만 보고 칭송을 할 때는 간호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위대해 보이거나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단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난 뒤에는 병원에서 만나는 간호사들이 달리 보이는 거야. 내가 깨끗하고 내가 편한 것보다는 나의 노동으로 인해 누군가 깨끗해지고 편안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더 값지고 위대한 삶이 아니겠니? 간호사의 손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물론 직업이란 우선 경제적인 수단인 것만은 무시할 수 없을 거야. 선생님도 그렇지. 학교에서 너희들을 가르치는 것이 사랑 때문만은 아니야.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가정을 꾸리고 그래야지. 그래서 직업이 소중하기도 한 거지. 하지만 거기에 사랑이 더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행복한 거지.(…)'

지금 수지는 학원이 끝나면 독서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는 시간이 조금 줄긴 했지만 이제는 막연히 하는 공부가 아니라서 그런지 실상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더 많다고 했습니다. 기초만 부족하지 않으면 혼자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수지에게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할 때가 많습니다. 그늘 한 점 없는 수지 특유의 해맑음 때문입니다. 수지는 자청해서 임시반장을 하겠다고 나설 만큼 당찬 구석이 있는 아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수지는 열심히 사는 아이입니다. 제가 한 일은 그 열심의 방향을 바로 잡아준 것뿐이지요. 어쩌면 그것은 교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지의 생일날 저는 새벽같이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지에게 전해줄 생일 축하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두세 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었을 수지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수지

새벽 1시 26분 4초
너의 세 번째 편지와 함께
찍혀온 시간

제가 원하는 꿈은 간호사예요,,
간호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학교에서 8시간
학원에서 4시간
독서실에서 2시간

그리고는
밤이 이슥해서야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아
내가 보낸 편지를 읽었겠지

답장 쓰느라 더 피곤하면 어쩌나
편지를 쓰지 말까 하다가도
밤늦은 시간 들어온 너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열심히 사는 사람의 모습처럼
세상에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 위에 한 가지 더
세상을 향해, 너의 영혼을 향해
왜냐고 물어보는 것

그리하여
눈처럼 흰 가운을 입은
청아한 모습의 나이팅게일보다는

목마르고 가난한 사람들
찢긴 몸과 마음 함께 꿰매주는
아름다운 수지가 되어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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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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