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노, 노인장! 손이 왜…?"
수없이 명멸하는 번개의 빛 때문에 눈이 멀 것만 같아 한동안 을 눈을 감고 있던 장일정은 반광노조의 손을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살이 녹아 내린 듯 보였던 것이다.
"생각보다 독성이 너무 세서… 하지만 괜찮네. 생사잠 덕분에 별 고통은 못 느꼈네."
"손을 좀 보여 주세요."
"허허! 되었네. 그나저나 이것을 받게."
"이건…?"
"자네가 찾던 만년뇌혈곤의 내단일세."
"노인장!"
장일정은 온통 녹아 내린 손으로 내단을 떼어내려 혼신의 힘을 기울였을 반광노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콧날이 시큰해짐과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울컥 눈물이 솟았기 때문이다.
장일정은 사내란 태어났을 때와 부모가 죽었을 때를 제외하곤 울어서는 안 된다는 훈육을 받고 자랐다. 아주 어렸을 때에도 이를 어기면 엄한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몽둥이 찜질을 당하거나, 한 겨울에 발가벗겨진 채 밖에 서 있어야 하였다. 때론 휘청거리는 버드나무 줄기에 피가 나도록 매질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지난 십 년 동안 눈물을 거의 흘리지 않았었다.
태극목장에서 부친의 봉분을 발견하였을 때와 사부인 북의가 죽었을 때를 제외하곤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솟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흐흑! 장말 고맙습니다."
"허허! 아니네. 아니야."
"아닙니다. 이게 아니더라도 소생은 노인장께 큰 빚을 졌습니다. 아까도 노인장이 안 계셨다면 죽었을 겁니다. 흑!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렸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것까지…"
"허허! 아니네. 노부가 한 일은 뭐 있는가? 아들놈이 살아 있었다면 자네 만한 손자가 있었을 것이네. 그래서…"
"흐흑! 고맙습니다. 소생이 지닌바 의술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노인장의 손을 원래의 상태로 고쳐놓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할아버지로 모시겠습니다."
"허허허! 허허허허!"
반광노조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장일정을 손자처럼 여겼기에 화관홍선사의 내단을 터뜨릴 때 느껴졌던 극렬한 고통을 나직한 신음만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생사잠을 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한줌 핏물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만년뇌혈곤의 내단은 주먹만하던 화관홍선사의 내단에 비하면 한참 작았다. 자두 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게만은 훨씬 더 무거웠다. 그리고 떼어낸지 제법 되었건만 온기가 느껴졌다. 과연 가공할만한 양기로 축적된 영물이었다.
* * *
"아니? 어르신은…?"
이회옥은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일타홍 홍여진의 뒤쪽 전각에서 걸어나오는 위맹하게 생긴 장년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직 산해관에 있을 무렵 조선의 이조참판 정현서가 사신으로 올 때 동행하였던 무관 조관걸이었던 것이다.
"날 아는가?"
"저어, 혹시 몇 년 전에 조선에서 온 사신 행렬을 수행하시던 조관걸(趙寬傑)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허어! 자네가 어찌 나를 아는가?"
조관걸은 아는 척을 하는 이회옥이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듯하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핫핫! 소생의 기억이 맞군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산해관에서 말을 타고 가다 뒤통수를 맞아 혼절했던…"
"무어? 그럼, 그때…"
이회옥의 말에 비로소 기억이 났다는 듯 조관걸은 반색을 하면서 한 발짝 다가섰다.
"예! 맞습니다. 핫핫!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핫핫! 반갑네. 여기서 자네를 다시 보게 되다니… 핫핫! 세상이 아무리 넓다해도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난다고 하더니… 정말 반갑네. 흐음! 훤앙해진 기태를 보니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네."
"하하! 소생은 잘 지냈습니다. 어르신께서도 별래무양하셨죠?"
"핫핫핫! 그럼, 잘 지냈지. 그나저나 아직 날씨도 덥지 않은 데 왜 영웅건으로 이마를 꽁꽁 동여맸는가? 답답할 테니 벗게. 자네의 훤한 이마를 다시 보고 싶네."
"예? 그, 그건…"
이회옥은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타홍과 그녀의 곁에 있는 묘령의 여인, 그리고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고 온 화담(花潭) 홍지함(洪芝含)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핫핫! 그때 자네의 번듯한 이마를 보고 이 다음에 크면 무슨 일을 해도 크게 할 것이라 생각했었네. 핫핫! 어서 영웅건을 벗어보시게."
"저어, 그, 그게… 죄송합니다."
"핫핫! 흉터라도 생겨 그러는가? 좋네. 안 벗어도 되네."
"아, 아닙니다. 사실은 그 동안 일이 좀 있어서…"
이회옥은 굳이 감추고 어쩌고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영웅건을 벗었다. 그러자 조관걸을 비롯하여 일타홍과 그녀의 곁에 있던 여인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삼천이십칠(三千二十七)이라 새겨진 다섯 글자 때문이었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듯 보기 흉한 그것을 보았으니 놀라지 않으면 이상하였을 것이다.
"아니…! 그건?"
"아앗!"
"허억!"
자자형(刺字刑)은 직계존속 상해나 살인, 기타 대역죄를 짓는 등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죄인이 아니면 처하지 않는 형벌이다. 따라서 평생가도 자자형에 처해진 사람을 보기 힘들다. 대부분 자자형에 처해진 후 다시 참수형으로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소생은 누명을 써서 무림지옥갱에 하옥되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을 넘게 있었지요. 이건 그때 새겨진 것입니다. 보기에 흉한 듯 싶어 가리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으으음! 무림지옥갱이라니? 그곳에 대한 소문은 들어 대강은 알고 있네만 아직 어린 자네를 어찌… 대체 어찌된 일인가?"
"허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자. 노부는 배가 고파서 더 이상은 못 있겠네."
"어머! 내 정신 좀 봐! 안으로 들어가세요. 음식 준비는 다 되어 있어요. 숙부님도 얼른 들어가시고요. 공자님도 들어가세요."
일타홍의 음성은 웬일인지 조금전의 앙칼짐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무슨 이유로 무림지옥갱까지 끌려갔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이 모습을 본 화담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허허허허!"
"어머! 왜요?"
"허허! 녀석, 호기심 많은 건 여전하구나."
"어머…!"
일타홍은 이회옥이 무림천자성 사람이지만 어떤 연유로 지옥갱까지 갔다 왔는지가 몹시 궁금하였다. 대개의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납거나 냉랭한 표정을 지으면 제대로 말해주지 않을 것 같기에 일부러 부드러운 어투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속내를 들키자 두 볼을 붉혔다.
이 모습을 본 이회옥은 한 송이 붉은 장미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렇기에 일타홍이라는 외호로 불리는 것이다.
"으으음! 자네가 무림천자성의 순찰이라니…"
조관걸은 이회옥의 긴 이야기를 듣고는 다 좋은데 불만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을 본 이회옥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무림천자성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문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
"무림천자성에는 두 개의 자[尺]가 있더군요. 하나는 자신들과 관계없는 일에 관여할 때 쓰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이익과 직결된 일을 해결할 때 쓰는 자입니다."
"그것은 천하인들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아는 것이거늘 아직 어린 자네가 어찌 그것을 아는가?"
조관걸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들으면 무림천자성을 욕하는 것도 같지만 어찌 들으면 입장을 대변하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후! 가까이 있으면 더 잘 보이는 법이지요."
"흐음! 그런가? 무엇을 보았는데?"
"근본부터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많이 썩어 있더군요. 그걸 감추려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악행을 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차차 알게되겠지요."
"그으래? 알겠네."
이회옥과 조관걸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모두에게 물러가라 한 후 화담 홍지함이 입을 열었다.
그는 선무곡 제일현자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아들에게 다향루를 물려준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십팔 년만에 귀향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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