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자네와 하던 말을 계속하여야겠네."
"소생, 세이경청(洗耳敬聽)할 터이니 말씀하시지요."
"좋네. 아까 고구려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신라방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네. 그리고 이정기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예!"
"다 알아들었는가?"
"어찌 잊었겠습니까? 소생의 머리가 아닌 가슴 깊숙한 곳에 각인하여 두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아까 이정기 장군이 왜 급서(急逝 :갑작스런 죽음) 했는지를 물었지?"
"그렇습니다."
이회옥은 자신의 선조인 이정기가 왜 하필이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전역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세상을 떴는지 몹시 궁금했었다.
뒷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하였지만 뭔가 큰 변고가 있었거나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여 반색을 하면 고개를 바짝 들었다.
"정말 중차대한 순간에 장군을 시해한 자가 있었네."
"예에…?"
"장군께서는 이웃 번진들과 연합하기 위하여 정략혼(政略婚)을 많이 하셨네. 따라서 부인과 자식들이 많이 있었지."
"……!"
"그 날은 장군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혼례를 올린 날이네. 하여 연회를 베푸셨지. 만조백관들이 저마다 감축 드린다면서 술을 올렸을 것이네. 자식의 혼례일이니 어찌 기쁘지 않으셨겠는가? 하여 대취토록 술을 드신 후 침소에 드셨다고 하네."
꾸울꺽!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회옥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깊은 잠에 취해있던 장군께서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깨어나셨네."
"왜, 왜요?"
"이미 무예가 하늘에 맞닿을 정도로 고절하여 무엇으로도 해할 수 없다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이루었기에 장군의 처소에는 경계하는 위사들이 얼마 없었네."
"그, 금강불괴요? 전설에서나 들어 본…?"
"허허! 그렇다네. 그 이야긴 나중에 하세."
"예!"
"잠에서 깨어난 장군은 가슴 깊숙이 박혀 있는 한자루 비수의 손잡이를 보셨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
"네, 네가 감히…? 은혜를 원수로…?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이 마지막 말씀이셨다고 하네."
"누, 누가 그런 거죠?"
이회옥은 누가 감히 은혜를 배반하는 짓을 자행했는지 궁금하였다. 이정기가 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런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만일 옆에 있었다면 천참만륙을 내고 싶을 정도였다.
"언젠가 장군께서 새로 점령한 곳에 시찰을 나가셨던 적이 있었네. 그때는 돌림병이 창궐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어갈 때였네. 그러던 중 돌림병에 걸려 다 죽어 가는 구판돌(九阪乭)이라는 자를 보시게 되었네."
"구판돌이요?"
"그래, 누군가의 노비였다고 하네. 돌림병에 걸리자 주인이 개천가에 내다버려 거기서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지."
"……!"
"장군께서는 다 죽어 가는 그를 구완하도록 명하셨네. 그러자 장군을 수행하던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였다고 하네."
"왜요?"
"똑 같은 병에 걸려 신음하는 병사들에게 사용할 약재조차 부족할 때였기 때문이지. 사실 그때는 약초가 워낙 귀해 그거 한 근이면 같은 무게의 황금과 같은 값일 때였네."
"으음! 그런데 왜 그러셨지요?"
패업을 이루려는 야망을 지닌 군주라면 비천한 노비보다는 전투에 나설 군사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회옥은 이정기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장군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패업을 이루려는 자는 군사력도 키워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병사에게 사용할 약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어찌 눈앞에서 죽어 가는 자를 못 본척하겠느냐? 이는 군주가 할 짓이 아니다. 그러니 저자를 당장 구원하도록 하라."
"으으음!"
이회옥은 이정기의 장쾌한 호연지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무조건 정복하고 보려는 야망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멋있는 군주가 조상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장군께서는 결코 포악한 군주가 아니었네. 오히려 진심으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인자한 군주셨지. 그래서 가는 곳마다 인심을 얻었네. 덕분에 징발하지 않아도 스스로 군사가 되겠다고 찾아온 자들의 수효가 부지기수여서 점점 더 강성해진 것이네."
"그 구판걸이라는 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인가요?"
"그렇네. 그자가 그런 못된 짓을 한 거지."
"그런데 왜 그랬나요?"
"허허! 그 이유가 너무도 어이가 없었네."
"뭔데요?"
"장군에게는 여러 딸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다운 딸은 셋째인 만화공주(萬花公主)이셨네. 놈은 무엄하게도 그녀와 혼례를 올리도록 해달라고 한 것이네."
"……!"
"그의 청은 일언지하에 거절되었네. 왜냐하면 공주는 이미 다른 사내와 혼례를 치른 몸이었기 때문이었네. 부군은 장군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부장(副將)이었네."
"구판걸이 그걸 몰랐나요?"
"아니네. 병에서 나은 그는 스스로 복노(僕奴)가 되기를 원했네. 그래서 장군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하셨지."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복노가 무엇인가요?"
"허허! 복노란 마차에서 사람이 타고 내릴 때 쉽게 딛고 내리라고 받침대를 갖다 놓는 종복을 말하는 것이네. 그게 없을 때에는 엎드려 등을 밟고 내려가도록 하는 천한 종복이지."
"아, 예!"
"구판걸은 공주의 혼사 때문에 부장의 가문으로 여러 차례 왕래한 바 있었네. 그러니 혼사를 모를 리가 없었지."
"그런 줄 뻔히 알면서 왜…?"
"그러니 어이가 없다는 거지."
"그런데 아까 금강불괴를 이루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회옥의 물음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화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장군께서 어이없게 목숨을 잃으신 것은 한 자루 비수 때문이었네. 크기는 불과 얼마 되지 않으나 이 세상에 못 벨 것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네. 그래서 금강불괴를 이루셨지만 비명횡사하신 것이네."
"저어, 그게 뭔데요?"
"제왕비(帝王秘)라는 것이었네."
"예에? 제, 제왕비요?"
제왕비라는 말에 이회옥은 대경실색하였다. 철기린이 신뢰의 표시로 준 그것이 자신의 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네. 장군께서 서거(逝去)하신 후 놈과 그것은 사라졌지."
"그,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요?"
"그것은 여인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품고 다닌다는 은장도(銀粧刀)보다 약간 큰 소도(小刀)이네. 한족(韓族)들의 영산(靈山)인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에 살던 독각은린수룡(獨角銀鱗水龍)의 가죽을 잘 마름질하여 만든 도갑에 들어 있네."
"도, 독각은린수룡이요?"
"그래. 문헌을 보니 고대에만 살던 수룡의 일종으로 길이는 대략 오 장 정도 되고 둘레가 일 장이나 되는데 천적(天敵)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고대수룡이네."
"으음!"
"도신은 푸른빛이 감도는데 아무리 오래 두어도 녹이 슬지 않는다고 하네. 그리고 손잡이에 붉은 빛을 발하는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는데 그것은 독각은린수룡의 내단이었다고 하네."
"으으음!"
이회옥은 화담의 설명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제왕비의 모습이 정확히 일치하자 일순 숨이 막히는 듯하였다.
"그 제왕비가 없어졌다고 하셨는데 어디로 간 건가요?"
"놈이 가져갔지."
"구판걸이요?"
"그렇네. 장군께서 서거하신 이후 사람들은 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놈을 찾았네."
"왜요? 첫째는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기 위함이었지. 놈 때문에 다 잡았던 고기인 중원을 다시 당나라에 내어 주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제왕비를 회수하기 위함이었네."
"아, 그래요?"
"제왕비가 왜 비수이면서 제왕비(帝王匕)라 안 불리고 제왕비(帝王秘)라 불렸는지 아는가?"
"글쎄요? 소생이 어떻게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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