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하루 세끼를 먹었을까요?"

<어릴 적 허기 달래 주었던 음식 2>'보릿고개'와 소작농 아이들

등록 2003.04.24 10:00수정 2003.04.2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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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의 역사


우리 역사에 굶주림에 허덕였던 시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임진왜란 이후는 줄곧 굶주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식(乞食)으로 거리를 헤매고 문전박대 당하면서 죽어 갔다. 고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아사한 아이들을 삼태기나 발채, 덕석에 둘둘 말아 봉분(封墳) 없이 마구 묻었던 '아장(兒葬)사리' 즉, '애기릉(陵)'이 마을마다 즐비했다.

조선 명종 때 '임꺽정의 난', 조선후기 순조 헌종 철종 당시 들끓었던 민란과 일본제국주의 수탈, 1950년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1967년 이후 10년 동안 지속되었던 '보릿고개' 까지 겪었으니 말이다.

윤재민(고대 한문학) 교수는《朝鮮經濟 史料講讀》시간에 "선생님, 언제부터 세끼를 먹었을까요?"라는 내 질문을 받고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도 하루 3끼를 먹는 경우는 없었다. 왕이라도 점심은 국수로 때웠지", 또한 "아침·저녁에 참을 먹고 점심때는 국수 등 간식을 들었을 뿐이야."라고 말하고, "결론적으로 하루 세끼가 서민에 정착된 시기는 해방 이후도 아닌 70년대 후반쯤 경제가 나아진 때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10년 전 아이들에게 "너희 밥 먹었니?"라고 인사하면, "선생님은 맨 날 밥 굶고 살았어요?"라고 되물음 당해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후 아이들에게 인사할 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요즘은 세끼 밥 먹는 일이 아무런 일이 아니요, 끼니 걱정하며 사는 시대는 아니잖은가?

보릿고개의 기억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봄철 보리가 패기 전 두어 달은 기아(飢餓)와의 전쟁이다. 온 가족이 굶어죽을 판이다. 벌써 초근목피(草根木皮) 중 나물과 풀뿌리는 캘 곳도 없어 나무 껍질까지 손을 대게 되는데 급기야 소나무 껍질이나 솔잎을 따서 말려 채 익지도 않은 보리와 섞어 먹게 되는 상황에 내몰리고 만다. 뜨물 들 즈음 알맹이를 따 말린 보리와 함께 끓여 몇 날 며칠이고 먹으니 실제 변비로 똥구멍이 찢어졌던 것이다.

몇 안 되는 산간 벽지(僻地) 깡촌에 살았던 나는 어머님이 '국 끓일 것이 없으면 소가 먹어 죽지 않은 풀 넣고 냇가에서 자갈 주워와 끓여서 먹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실제 음력 3~5월은 물론이고 7~8월에도 보리쌀 마저 없어 옆집으로 빌리러 다니던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우리 집에 춘궁기(春窮期)는 6월과 9~10월 석 달 빼고 연중 지속되었다.


시인은 당시 처절한 상황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보릿고개
황금찬(黃錦燦)<현장(1965)>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밥 할 때가 되면 어머니는 박을 말려 만든 한 되 짜리 자그마한 됫박을 들고나섰다.

"엄마, 어디 간가?" 하면,
"잉, 보리쌀이 떨어졌구나!"

세상 물정을 조금 알게 되던 어느 날에는,

"아부지는 아신가요?"
"그럼!"

"누구 집으로 가시간디요?"
"오늘은 연바람댁에서 취여 올란다."
"그럼 댕겨 오싯쇼!"

그날 이후로 난 배고프단 말을 못했다.

어느 밤이었다. 잠결에 두 분이 소곤소곤 나눈 얘기를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이~. 셋째 놈 말이여…."
"뭐시라우?"
"정 안 되믄 큰집으로 보내야 쓰는 것 아닌가?"
"글쎄 말여라우…. 올 봄만 한 번 넘겨보십시다."
"그럼 금순이라도 지 외갓집으로 보내자고…. 당장 먹고살아 남아야제 다 죽으면 된당가?"
"모르겄소. 직아부지가 알아서 하싯쇼."

4남 2녀로 6남매였던 우리 집엔 식구(食口)가 많았다.

소작농과 보릿고개

나를 낳기 이태 전까지는 논이 삼십 마지기 넘는 알부자였단다. 아버님이 사업 실패로 가계가 기울기 시작할 때 마침 한반도 전역이 가뭄과 냉해(冷害)로 보릿고개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67년에 태어난 나는 그래서 키가 형제 중 가장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소작농(小作農)과 보릿고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소작을 '묵갈림'이라 했으니 묵갈림은 논밭이 없는 사람이 지주에게 소출의 절반을 주는 제도다. 소·돼지도 그렇고 토지도 그렇다. 문제는 토지를 빌린 사람이 농사에 들어가는 제반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었다.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주인은 논으로 발걸음을 하신다. 정확히 혜어 다발을 나누기 위해서. 주인은 열 다발씩을 사려 따로 모아둔 낟가리를 자신의 것만 가지고 가버리면 끝이지만 소작농은 품삯, 비료대, 종자비용, 수리조합비(水利組合費), 운반비, 경운비(耕耘費), 탈곡비(脫穀費) 까지를 제하고 나면 시쳇말로 '맨날 그 팔짝(자)'이 되고 만다.

그러니 가을 추수를 해도 며칠 뿐 농사짓느라 들어간 빚 갚고 농약대까지 치르고 나면 남는 것이 있겠는가? 농사라는 것은 그래서 예로부터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소작농은 지주와 마름으로부터 끊임없이 고리(高利)에 빌리고 되 갚아야 하는 고리를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주에게 소출 분할 제도를 바꿀 것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논 한 마지기 없는 사람이 줄서 있었기 때문에 그 관계는 지속되었다.

죽어라 일해보아야 개선의 여지가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활이 1976년 '녹색혁명'이라 일컬어 졌던 통일벼의 보급과 이후 유신벼의 등장으로 수확량이 재래종 '일반벼'에 비해 많게는 서너 배 늘고 추곡수매제도를 운영하면서 다소 숨통을 텄으니 '호랑이 담배필 적'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다.

조금 나아져서야 부황(浮黃; 오래 굶어서 살가죽이 누렇게 부어오르는 병)나지 않으려고 감자, 고구마, 옥수수, 밀기울 등 구황작물(救荒作物)로 때우기 위해서 왕복 십리나 되는 먼 산비탈 화전(火田)을 일구는데 따라 나섰던 기억이 30년 전의 일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먹을거리 간단한 소개

참꽃 진달래가 더 이쁜 것은 따먹을 수 있어서다. 개꽃 산철쭉과 철쭉이 반갑지 않은 것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칩을 지나면 진달래꽃을 따서 그 쌉싸름한 맛에 취했다. 찔레 싹 '찔구' 꺾어 먹고, 묘동에 가서 '삐비' 뽑아 먹고, 논두렁 언덕에서 잔디 뿌리인 '띠뿌리' 캐먹고, 고사리 꺾으러 가신 어른들이 뜯어온 어린 칡넝쿨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보리를 구워 싹싹 비벼 먹으면 아이들은 흑인이 되었다. 심심풀이라고는 몰랐던 아이들은 생 밀을 비벼 껌으로 씹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점심; 點心, 일일이식(一日二食)을 했던 때 아침과 저녁 사이에 드는 간단한 식사를 일컫는 말. '배고픔을 요기하며 마음(心)에 점(點)을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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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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