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생님…

영화 속의 노년(53) -〈마지막 수업〉

등록 2003.04.24 17:20수정 2003.04.2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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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전해진 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자살 소식.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심정적으로 어느 편에 서든, 그 분의 자살에 대해서는 모두들 착잡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접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별로 화내는 일도 없이, 창 밖의 나무처럼 하늘처럼 그렇게 계셨다.

프랑스의 한적한 마을 학교는 꼭 우리 나라의 오지 분교같았다. 네 살 반짜리 아기에서부터 중학교 입학을 앞둔 형들까지 모두 한 교실에 모여 분단만 달리한 채 공부를 한다. 선생님도 한 분뿐이시다. 동그라미 그리기와 1, 2, 3, 4를 배우는 꼬마들, 곱셈이 어려워 쩔쩔매며 받아쓰기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마침표"에 '마침표'까지 글씨로 쓰는 아이들. 우리들 어려서 글자를 익히고 셈을 배우던 모습 그대로이다.


선생님의 조용한 목소리와 차분한 품성을 닮아서일까. 교실에서 뛰고 떠들며 책상과 의자를 우당탕 거리는 아이들은 없었다. 선생님과 약속을 했는지 수업 시간에 할 말이 있으면 서로 소근거리며 이야기하고, 그래서 교실 안의 시간은 전체적으로 조용 조용 흘러간다. 놀이 시간은 따로 밖에서 진행되는데 그 중에서도 학교 근처 산비탈을 이용한 눈썰매 타기는 어찌나 신나고 재미있는지 나도 아이들하고 같이 내달리고 싶었다.

곧 중학교에 입학할 가장 윗 학년인 줄리앙과 올리비에가 싸우자 선생님은 둘을 나란히 앉게 한다. 문제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며 아이들이 입을 열 때까지 계속 말을 시키는 선생님. 다정한 친구였던 둘은 줄리앙이 올리비에를 놀리는 바람에 사이가 나빠졌고, 그것이 결국 싸움에 이른 것이었다. 선생님은 때려서 생긴 상처보다 말로 생긴 상처가 더 아플 수 있다며, 동생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느냐며 역시 조목조목 알아듣게 말씀하신다. 손바닥을 때리는 일도, 손을 들고 벌을 세우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 시간에 색칠하기를 마치지 못한 꼬마 조조에게는 약속을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왜 학교에 오는지, 공부라는 것은 무엇인지 아이가 답을 하도록 옆에 데리고 앉아 묻고 또 물으신다. 잉크로 범벅이 된 손을 닦고 오라고 해도 조조는 대충 닦고, 날아들어온 말벌 이야기만 한다. 수세미로 일일이 닦아주시는 선생님. 학교 2층에 사시는 선생님의 일과는 그렇게 지나간다.

이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 스페인 이민 1세인 아버지는 농부이셨고, 아들이 교사가 되는 것을 신분 상승이라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셨단다. 어린 시절에 학교 놀이를 하면 늘 선생님 역할을 했고, 선생님을 빼놓고는 한 번도 다른 일을 생각해보지 않으셨다는 선생님.

교사 생활 35년, 이 곳에서만 20년을 보내셨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끝없는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다'며, 자신이 이 일을 정말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는 말씀도 카메라를 보시며 직접 하신다. 관객들에게 곧장 전해지는 그 말에는 평생 원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길을 지켜온 사람 특유의 평온함이 묻어난다.

선생님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새로운 선생님이 오실 것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줄리앙과 올리비에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할 것과 사이좋게 서로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시며, 자폐증세로 인해 특수학교로 옮기게 되는 나탈리에게는 새로운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재미있게 지낼 것을 부탁하신다.


여름방학 하는 날. 한 아이 한 아이 안아주며 뺨에 입을 맞춰주시는 선생님. 아이들이 다 나가고 교실에 홀로 남은 선생님의 눈가는 붉어져 있고, 코가 시큰해진 선생님은 한 번 코를 훌쩍하시며 손으로 쓰윽 닦으신다.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35년의 교사 생활을 마치는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교실에서 아이들과 보내셨다. 교사로서 끝까지 아이들과 함께 하셨다. 그 마지막을 지켜본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옆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신 어르신 두 분은 이 영화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인 줄 아셨다고 했다. 패전으로 인해 모국어 수업을 금지당하게 되자, 마지막 수업 시간에 '모국어를 지키는 것은 감옥의 열쇠를 지닌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선생님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다고 했다.


입술 위까지 흘러내린 코를 살짝 살짝 빨아먹던 아이는 교실 밖 자연의 변화처럼 모르는 사이에 키가 자라고, 소풍 가는 날 처음 타본 기차가 신기해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들은 어느 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될 것이다. 그 변화와 성장에는 선생님이 계시다.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고, 사람들이 심한 갈등을 거쳐 무언가 멋지게 해결되고 그럴듯한 마무리를 하는 그런 영화를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그 기대에 맞지 않는다. 숫자 하나 쓰기에도 힘이 드는 꼬마들과 공부하다 말고 지금이 아침인지 한낮인지 불쑥 물어보는 엉뚱한 녀석들을 카메라는 그저 흔들림없이 따라다닐 뿐이다. 우리들 어린 시절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던 그 때가 생각나 웃고, 그 뒤에 든든히 서계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며 아득한 그리움을 품게 한다. 아, 정말 선생님이 계셨지….

(마지막 수업 Etre et avoir, 2002 / 감독 니콜라 필리베르 / 출연 조르쥬 로페즈, 알리제, 악셀, 기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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