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먹고 풍성해 지는 자연이 주는 소리

조금만 더 천천히 가라

등록 2003.04.24 19:47수정 2003.04.2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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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4월 23일 종달리

2003년 4월 23일 종달리 ⓒ 김민수

요즘 제주는 고사리 장마가 한창입니다. 비가 오고 나면 고사리가 쑥쑥 올라온다고 붙여진 이름이지만 고사리만 쑥쑥 자라는 것이 아니라 봄비를 먹고 산야의 모든 자연들이 쑥쑥 자라납니다.


여름철의 장마비처럼 거세게 내리지는 않는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봄비, 그러나 그 봄비는 말랐던 가지들마다 새순을 돋아나게 합니다. 비가 오고 나면 하루가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서 보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면 온갖 좋은 것들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퇴보하는 듯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a 2003년 4월 15일 종달리에서 찍은 '팽나무'

2003년 4월 15일 종달리에서 찍은 '팽나무' ⓒ 김민수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새순이 돋아있긴 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새순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던 팽나무(폭낭)는 봄비를 양식 삼아서 부지런히 새순을 내고 있습니다.

비가 잠시 그친 뒤 팽나무를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껏 새순을 준비하고 있다 일제히 '하나, 둘, 셋!'하고 내어놓은 듯 풍성해진 나뭇잎을 보고 '그래, 그 마른 나뭇가지 안에 저렇게 많은 잎들을 품고 있었으니 아무리 추운 겨울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었겠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날 새순을 풍성하게 내고, 여름 날 햇살에 더욱 더 무성해진 나무가 되는 꿈, 그 희망이 추운 겨울바람도 꿋꿋하게 이기게 한 것 같습니다.

a 2003년 4월 20일 위와 같은 나무

2003년 4월 20일 위와 같은 나무 ⓒ 김민수


a 2003년 4월 23일 위와 같은 나무

2003년 4월 23일 위와 같은 나무 ⓒ 김민수

봄비를 먹고 일 주일 만에 자라난 새순입니다. 새순에서 멈춘 듯 멈추지 않는 생명의 운동을 봅니다.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가는 걸음이기에 뜨거운 여름햇살에 더욱더 선명한 초록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실내에서 기르는 화초들을 보면 자연에서 자라는 것들보다 빠르게 새순을 내지만 여름 뜨거운 햇살에 내놓으면 이내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자연의 상태에 있는 것과 모양새는 비슷하지만 본래 자연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잃어버렸습니다. 빠른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이제 이번 고사리장마가 지나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취기 시작하면 연록색의 나뭇잎들이 더욱 더 진한 푸르름으로 옷을 바꿔 입을 것입니다. 나뭇가지마다 새순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이상 없을 무렵이면 완연한 여름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계의 변화가 있는 동안 나무는 멈춘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자라면서 봄비가 내리는 날도 맞이하고, 태풍이 부는 날도 맞이하고, 뜨거운 햇살이 이글거리는 목마른 날도 맞이하고, 칼바람이 부는 겨울도 맞이합니다. 그렇게 사계를 지내고 또 지내면서 각각의 계절에 해야 할 일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한번 뿌리 내린 곳에서 길게는 천 년 이상 이러한 일들을 반복하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자연, 그 자연에게서 조금 천천히 가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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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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