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시금치를 위한 기도

등록 2003.05.05 07:39수정 2003.05.0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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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봄에 뿌린 시금치 씨앗이 총총 올라와 솎아먹는 재미를 한참 주더니만 제법 커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 되었다.


작은 텃밭에 짓는 농사라 기왕이면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며칠 전부터 시금치 잎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한다. 지인들이 이런저런 약을 뿌리면 된다고는 하는데 뿌릴 생각이 없으니 약이름이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비가 오고나면 좀 나으려나 생각했는데 비가 온 뒤에도 여전히 시금치 잎이 누렇게 변해서 그 영역을 넓혀간다.

생계를 위해서 짓는 농사가 아님에도 병든 시금치를 보니 마음이 상하는데 생계를 위해서 짓는 농사가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그 속이 타들어갈까?

새벽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나의 작은 텃밭에 섰다.

그럭저럭 작은 텃밭에 키운 것으로 우리 식구의 식탁은 풍성해 진다. 무농약으로 기른 것이니 모양새가 좋지 못하고, 벌레도 먹고, 억세기도 하지만 직접 키워서 먹는 맛이 멋드러지게 포장된 대형슈퍼마켓에서 사는 것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a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나의 작은 텃밭에서....작은 텃밭에는 마늘,상추,토마토,가지,고추,머위,파,옥수수,오이,호박,감자 등이 있습니다.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나의 작은 텃밭에서....작은 텃밭에는 마늘,상추,토마토,가지,고추,머위,파,옥수수,오이,호박,감자 등이 있습니다. ⓒ 김민수

요즘 마을 입구에는 '농민생존권 위협하는 칠레자유무역협정 결사반대!'라는 내용이 써진 현수막이 걸렸다.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는 농촌의 현실, 풍년이 들면 풍년이 드는대로 농산물값 하락으로 한숨이요, 흉년이면 흉년이 드는대로 마음이 타들어간다. 이런 악조건에 값싼 외국농산물이 들어온다면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는 농민들의 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결사반대!'할 수밖에.


유신체제 하에서 실시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수출주도형 정책으로 철저하게 농촌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농촌을 피폐화시켰기에 아무리 열심히 땅을 가꾸고 일궈도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모든 책임은 농민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수출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무엇을 수입하고 수출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수출을 해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수입함으로 불이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는 덜어주어야 할텐데 일방적으로 불이익을 감내하라고만 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농어촌 지역에 살다보면 경제사정이 어떤지 통계자료를 보지 않아도 피부로 느껴진다. 텅빈 오일장, 적막감이 감도는 새벽 어시장, 무언가 풀어야 할 실타래를 풀지 못한 듯한 무뚝뚝한 표정들은 그동안 흘려왔던 땀의 의미,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손마디의 의미, 성한 곳이라고는 없는 육체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리기에 충분하다.

열심히 일해도 매일 그 자리에 서있는 느낌, 아니면 뒤로 물려나 있는 느낌, 소외된 느낌은 삶을 얼마나 허탈하게 만드는가?

아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좋은 나라는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나라요, 나쁜 나라는 힘센 사람들만 더 잘 살 수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약한 사람들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 나라인지, 경제지표만 가지고 좋은 나라, 나쁜 나라의 편가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병든 시금치밭이 마치 농촌의 현실같아 마음이 아프다.
병든 시금치를 위한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땅에 뿌려져 싹을 내고 뿌리를 내려 풍성하게
씨뿌린 이의 식탁에 올라
몸에 모셔져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부터
더욱 더 푸른 빛을 내고 싶은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내 몸 여기저기 노란 점이 생기더니
이파리를 하나 둘 잠식해 가기 시작하네요.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온 몸을 부르르 떨어보지만 떨어지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
이제 새록 돋아나는 새순마져 말라버리면
그 죽음의 그림자가 새순까지 덮쳐 버리면
뿌리마져 썩어버리겠지요.

하나님,
그래서는 안됩니다.
시금치의 소망은 사치스러운 소망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품었던 그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절망하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이파리를 하나 둘 잠식해 가는 그 순간에도
새순을 내는 삶에 대한 진지함을 내버려 두신다면
희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순마져 말라버리면
새순까지 덮쳐버리면
하나님,
그래서는 안됩니다.
안됩니다.


농촌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고민을 토로한다.

"밭에 가서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모르것다. 풍년이 들면 농산물값이 똥값이요, 그렇다고 흉년들라고 기도할 수도 없고...."

"목사님, 풍년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죠. 그리고 제값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죠."

나의 대답에 '헐!'하고 웃는 목사님,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답답하이'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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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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