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 출동!" 적막을 깨는 사이렌 소리

[새벽을 여는 사람들-14] 119 구급대원 소방사 황윤희씨

등록 2003.05.18 16:40수정 2003.05.2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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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세종로 구급 출동! 종로구 종로 1가 보신각 구급출동!"


18일 새벽 5시. 종로 소방서 세종로 파출소에 사이렌 소리가 한바탕 요란을 떤다.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것.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잠을 자던 그녀가 밖으로 나온다.

24시간 항상 대기. 소방서 건물 밖으론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잠을 잘 때도, 화장실에서도, 밥을 먹는 식당에서도, 그녀의 온 신경은 사이렌 소리에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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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119 구급 대원 소방사 황윤희(27)씨는 얼마 전 경방(화재 진압)에 신입이 들어오기 전까지 세종로 파출소의 막내였다. 그녀가 구급 대원으로 일한 것은 4년 전인 99년도.

"녹초가 돼서 돌아왔던 기억만 나요."

첫 출동의 긴장감 대신 녹초가 돼 돌아온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다. 구급대원은 24시간 맞교대를 하기 때문에 하루를 꼬박 일하고 하루를 꼬박 쉰다. 입사 첫날 난생 처음 하루 종일 뜬 눈으로 밤을 샌 그녀가 첫 출동이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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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5분만에 현장에 도착하니 30대 한 남자가 구급차를 향해 걸어온다. 와이셔츠는 빨간 피로 얼룩져 있고 그는 만취한 듯 혀를 꼬부린다. 그녀가 침착하게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다.

남자는 연방 "죄송하다"며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한다. 응급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술에 취해 다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험한 꼴도 많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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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처음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시비가 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파출소 행이 잦다. 그날도 취객을 파출소에 인계한 후 신고자에게 인적사항을 묻는데 갑자기 따귀를 맞았다. 태어나 처음 맞아본 따귀였다. 다행히 경찰이 옆에 있어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속상했다.

종종 만취자에게 욕도 먹고 손찌검도 당하지만 정작 그녀를 속상하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응급처치를 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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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강동 소방서 구조대원으로 일하는 남편은 그녀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24시간 맞교대를 하는 구급대원의 특성상 회사 생활을 하는 남편이었다면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소방서측이 부부의 비번 날짜가 같겠끔 배려해 둘은 언제나 함께 한다. 게다가 남편은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알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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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입사 초기 그녀에게는 전화벨 소리마저 소방서 출동 사이렌 소리로 들렸다. 잠을 자다가도 전화벨 소리에 놀라 출동 준비를 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한번은 뻐꾸기시계를 선물 받았다. 시간만 되면 '뻐꾹 뻐꾹' 울리는 시계를 벽에 걸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남편이 근무하는 소방서의 출동 사이렌 소리가 뻐꾸기 소리였다. 한참을 자던 남편, '뻐꾹' 소리에 놀라 출동 준비를 했다. 결국 시계는 벽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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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구급 대원은 일단 응급 처치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다양한 사건 사고에 대한 경험, 마지막으로 사람들과의 대화 능력이 필요하겠죠."

구급 대원이 갖춰야 할 세 가지를 말해달라고 하자 그녀의 똑 부러진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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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오전7시. 또 다른 출동현장.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이 촉촉하다. 이제 막 23개월 된 아이의 온 몸에 열이 나자 당황한 엄마와 아빠가 119 버튼을 눌렀던 것이다. 엄마는 걱정스런 맘에 숨도 제대로 못 쉰다. 그녀 역시 두살바기 딸 '인아'가 있다. 누구보다 그런 맘을 잘 아는 그녀가 "괜찮다"며 엄마를 안심시킨다.

인아도 가끔 아플 때가 있지만 다행히 지금까진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 그녀는 인아에게 지혜롭고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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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그녀가 힘든 점은 딱 하나. 바로 체력이다.

"체력이 달리는 게 가장 힘들어요. 들것을 들어야 하는데 제가 다른 분보다 힘이 약하니까 잘 못 들죠. 가끔 지나가던 시민들이 도와줄 때도 있지만 새벽에 지하철 같은 곳은 계단도 많고 사람들도 없어서 정말 힘들어요. 그리고 산에서 사고가 나면 어느 정도는 차로 가지만 그 이상은 걸어 올라가는데 제가 따라잡질 못하니깐 전 밑에서 기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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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구급 대원은 봉사 의식과 희생정신이 없으면 안돼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도움을 청할지 모른다. 한밤중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대형 사고 현장에서 부르는 것일 수도, 만취자의 단순한 귀가 도움 요청으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온몸 세포는 누구로부터 시작된 사이렌 소리일지라도 반응한다.

"구급 출동! 구급 출동!"

고요하던 세종로 파출소의 적막이 깨지고 119 구급대원의 도움을 기다리는 신호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린다. 자, 이제 또 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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