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 산하에서 이름 없는 충혼이 되신 영령이시여!

항일유적답사기 (23) - 청산리 전적지

등록 2003.05.23 12:00수정 2003.05.2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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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적지 일대의 산하
청산리 전적지 일대의 산하박도
청산리

다음 행선지는 청산리 전적지다. 그 새 10시가 넘었다. 도중에 참외 하나를 깎아먹었지만 시장기가 돌았다. 청산리로 달리면서 운전 기사에게 어디든 아침 요기를 할 수 있는 곳에 차를 세우라고 부탁했다.


운전 기사는 도로 옆 밥집 두어 곳에 차를 멈추고 조반을 부탁했으나, 두 곳 모두 시간이 일러서 준비가 안 된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하는 수 없이 한참 더 달려 그 일대에서는 제법 큰 도시인 화룡(和龍)의 고급 빈관 찬청에 들렀다. 거기서도 안된다는 것을 사정했더니 간단한 빵과 야채 그리고 국 정도만 마련된다고 했다.

시장이 반찬으로 간소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아침과 점심을 겸하게 된 셈이었다. 갈 길이 멀어 수저를 놓자마자 서둘러 출발했다.

화룡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 상징물 '용' 모형
화룡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 상징물 '용' 모형박도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용(龍)을 상서로운 동물로 좋아했는지, 중국 일대에는 인명·지명에도 ‘용’자가 유난히 많이 들어갔고, 각종 문양에도 빠짐없이 용을 새겨놨다.

룡정에서도 그랬지만 화룡 중심지 네 거리에도 철탑을 세우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양을 한 황금색 용을 걸어두었다.


화룡 시가지를 벗어나자 다시 비포장 도로였다. 우리가 탄 차는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아서 창을 열고 달렸는데, 때문에 꼬박 후텁지근한 흙먼지를 뒤집어 썼다.

만주 대륙은 위도는 높지만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한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바람조차 후끈한 지열이 밴 탓으로 습하고 뜨거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이 온통 먼지를 뒤집어 써서 호호 백발이었다.


출발 전에 좀 더 나은 차를 빌리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그러나 다행히 운전 기사는 이곳 지리에 비교적 밝았고, 지난해 청산리 전적지를 안내한 경험이 있는지라, 좋은 차보다 길을 잘 아는 기사를 만난 게 더 좋았다고 스스로 위안삼았다.

물론, 길도 잘 알고 차의 성능도 좋다면 비단에 꽃수를 놓은 격이겠지만, 세상사 어디 ‘물 좋고 정자 좋은 게’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게다.

화룡에서 백두산 가는 길로 40여 분 달린 후, 운전 기사는 인적이 아주 드문 조용한 산촌 마을 들머리에 차를 멈췄다.

청산리 마을이라고 했다. 하지만 표지물을 찾아야 한다. 그 언저리를 헤매다가 마침 차 한 대 겨우 빠져나갈 오솔길 옥수수 밭 좁은 길섶에서 ‘부흥향 청산리(復興鄕 靑山里)’라고 새긴 표지석을 찾았다.

부흥향 청산리 표지석
부흥향 청산리 표지석박도
그 조그마한 시멘트 표지석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대로 껴안고 싶었다. 먼저 표지석을 카메라로 한 컷을 찍고 언저리를 둘러봤다. 그 근처에는 집이 두어 채 있었으나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지난 역사의 증언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운전 기사는 계곡 쪽으로 좀더 오르면 청산리 항일 전적비가 나온다고 했다.

우리는 통칭으로 ‘청산리전투’라고 알고 있지만, 청산리전투는 이 일대의 여러 차례 전투를 합하여 일컫는 것으로, 백운평(白雲坪)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 등 10여 차례의 전투가 모두 포함된다.

우리는 다시 청산리 마을에서 백운평 골짜기로 뚫린 좁은 길로 달렸다. 백운평으로 가는 길은 삼림도로로 길이 몹시 험하고 좁아서 트럭이나 지프차는 몰라도, 일반 승용차가 지나기는 힘든 길이었다.

백운평 골짜기 좌우가 모두 산등성이로 내 얕은 군사지식으로도 적을 유인하여 매복 전투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으로 천연 요새의 협곡이었다.

백운평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지휘한 대한군정서군(大韓軍政署軍)이 치른 전투로 청산리대첩의 실마리를 열었다.

그해 10월 20일, 일본군 야마다 연대의 주력이 화룡현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온다는 첩보를 듣고,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백운평 일대의 고지마다 독립군을 전투 편제로 이중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여기에서 기다렸다.

백운평 전적지 일대는 백운평 계곡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는 곳이었다. 또한 그 사이가 공지로 오솔길이 나 있기에 일본군 주력 부대가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산리에서 백운평 가는 길
청산리에서 백운평 가는 길박도
10월 21일 아침 9시경,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야마다 연대 전위부대는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이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이때를 기다리던 6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이 10여 보 앞까지 이르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30여 분만에 독립군은 약 200명으로 추산되는 일본군 전위부대를 섬멸했다.

전위부대에 이어 야마다 연대 주력부대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기관총과 포를 앞세우고 돌격해 왔다. 하지만 지형에서 우위를 차지한 독립군의 방어에 일본군은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이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어랑촌·완루구·고동하 등지에서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우리 독립군이 모두 승리하였다. 참으로 통쾌한 대첩이었다.

초라한 전적비

우리 일행은 백운평으로 가는 길 옆 풀숲에 있다는 널빤지로 된 ‘청산리항일전적지(靑山里抗日戰績地)’표지목을 찾느라 꽤 고생했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여러 곳을 샅샅이 뒤진 끝에 우거진 잡초에 가려져 있는 목비(木碑)를 간신히 찾았다.

운전 기사의 눈썰미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그 언저리에는 아무런 안내판도 없었다. 청산리대첩이란 이름에 견주면 너무나 초라한 나무로 된 비였다.

오래 전 어느 분이 이곳을 참배한 흔적인 듯한 낡은 술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필자는 목비(木碑) 옆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걷어내고 그 언저리를 말끔히 청소한 후, 서울에서 가져간 소주로 주위에 뿌린 후, 새 잔을 드리고 두 번 절을 올렸다.

“이역 산하에서 이름 없이 외로이 나라의 충혼이 되신 영령이시여! 편히 지내옵소서.”

수풀에 싸인 청산리 항일 전적비
수풀에 싸인 청산리 항일 전적비박도
청산리대첩에 견주면 너무나 초라한 목비(木碑)라 선열을 우러러 뵙기가 부끄러웠다. 어떤 분노가 솟구쳤다. 이것이 바로 선열에 대한 후손들의 현주소라고 생각하니 씁쓸함이 묻어났다.

당시 기록을 보면 독립군들은 군량미가 떨어져 소나무 껍질과 솔잎으로 빈속을 채웠고, 나중에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배낭 속에 있는 양초(옛날에는 유지 외 밀랍이나 밥알을 으깨어서도 양초를 만들었다 함)까지 꺼내서 조금씩 나눠 먹었다고 한다.

적의 총알을 맞고 일본 군도에 찔려, 또한 배고픔으로 죽어간 무명 용사가 이 계곡 곳곳에 누워 있으리라. 나는 얼른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오래 엎드려 있었다.

“멀리 고국에서 찾아온 후손이 님들에게 바치는 한 잔 술로 원혼을 달래옵소서.”

강용권 씨의 <죽은 자의 숨결 산 자의 발길(하 269쪽)>에 따르면 1920년 당시 이 백운평 마을에는 20여 호의 주민들이 몰려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았던 조봉춘(1912년생)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날 아침, 백운평 마을사람들은 독립군들에게 밥을 해서 날라다주었다. 그 전투에서 참패하고 내려오던 일본군 패잔병들은 이 마을을 덮쳐 주민들에게 무참히 보복했다. 이들은 온 마을의 사람들을 한곳에 세워다놓고, 그 중 남자들이라면 젖먹이 아이들까지 모조리 학살하여 불태워버렸다. 이 마을 주민 중에서 단 한 사내만 살아났는데, 그는 여자 옷차림으로 변장해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해가 경신년으로, 그때 불타버린 마을 터에는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은 폐허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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