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기병 1개 중대를 전멸시킨 천수평 전투

항일유적답사기 (22) - 천수평 전적지

등록 2003.05.22 15:00수정 2003.05.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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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천수동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물

천수동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표지물 ⓒ 박도

천수평

다음 행선지는 청산리 전투지의 하나였던 천수평(泉水坪) 전적지였다. 어랑촌을 벗어나 서남쪽으로 달렸다.


마침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호로(胡老:중국 노인)에게 천수동을 물었더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를 달려도 천수동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 비포장 도로를 10여 분 달리자 그제야 깊은 계곡 속에 천수동 마을이 나왔다.

중국인들의 거리 관념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국토가 넓은 대국인이라 ‘조금’이란 단위가 몇 10킬로미터는 된 듯했다.

천수평 전적지는 지금은 천수동 마을 ‘길림성팔가자림업국천수동림장’(吉林省八家子林業局泉水洞林場)이 들어선 곳이다.

1920년 10월 22일 꼭두새벽에 이동 중이던 독립군 대한군정서군이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독립군은 곧장 강행군을 계속하여 천수평에 이르렀다. 그때가 5시 30분,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으로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120여 명은 독립군이 접근해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독립군은 일본군 야영지를 완전 포위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일본군은 전의를 잃고는 허둥대기만 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중에서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전멸시켰다.

a 길림성팔가자림업국천수동림장’(吉林省八家子林業局泉水洞林場) 하마터면 이 사진도 못 찍을 뻔했다.

길림성팔가자림업국천수동림장’(吉林省八家子林業局泉水洞林場) 하마터면 이 사진도 못 찍을 뻔했다. ⓒ 박도


나는 천수동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전적지라는 임장(林場) 정문 현판과 건물 사진부터 찍었다.

그런 후, 공장 내에 전적비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사무실로 갔다. 직원에게 부탁했더니 그는 곧장 우리 일행을 공장장에게 안내했다.

공장장은 40대 초반쯤의 한족이었다. 한 기사가 중국말로 한참을 교섭하는 동안 그는 우리 몰골을 한참 훑고는 가부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공장장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 마침내 공장 내 모든 시설물이나 공장 건물도 일체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나서서 사정하기에는 중국말이 벙어리라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다행히 공장 현판과 건물이나마 미리 잘 찍어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볕이 있을 때, 건초를 말려라.”는 서양 속담은 유적지 답사를 하는 사람에게도 명언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색다른 풍물이나 역사 현장은 누가 뭐라 하든 보이는 대로, 도착하자마자 사진부터 찍어둬야 된다. ‘다음에, 돌아올 때, 날이 개면 찍지.’하면서 다음으로 미뤄 버리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번 답사기간 중에 몇 번을 놓친 적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아쉬운 장면을 놓친 것은 장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이었다.

드넓은 만주 벌판을 눈이 시리도록 보고 달리면서 몇 번을 카메라에 담으려다가 끝내 놓쳤다.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는 계속 비가 내려서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개면 찍는다고 미뤘다.

하지만, 장춘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빗줄기가 더욱 세찼고, 거기다가 열차 시간에 쫓기고, 날씨 탓으로 금세 땅거미가 깃들여서 도저히 만주 벌판을 앵글에 잡을 수 없었다.

그 광활한, 아득한 지평선 만주 벌판은 끝내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지 못하고 내 마음의 눈에만 선할 뿐이라 두고두고 못내 한스러웠다.

인생사의 기회도 마찬가지이리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a 망망대해 같은 만주 대평원, 상상을 초월한 드넓은 대지에 그만 기가 질렸다.

망망대해 같은 만주 대평원, 상상을 초월한 드넓은 대지에 그만 기가 질렸다. ⓒ 박도


〔2000년 여름, 뜻밖에 2차 동북 답사 기회가 왔다. 2000년 8월 18일, 그날은 날씨도 쾌청해서 나는 만주벌판을 원 없이 카메라에 담아서 이 기사 여러 곳에 싣고 있다. 마음 속에 담고 묵묵히 때를 기다리면 기회는 또 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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