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랑촌 마을의 집, 널빤지 담과 통나무 굴뚝이 이채로웠다.박도
동행한 이 선생은 이런 허름한 옛 집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고국에 대궐 같은 집(안동의 임청각을 말함)을 두고서 남의 나라에 와서 풍찬 노숙을 하거나,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이런 움집에서 당신 조상들이 살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나마 왜놈들에게 쫓겨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 못하고, 대부분 독립투사들은 온 만주 땅을 동가식서가숙하며 부평초처럼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사람들은 아직도 대부분 조선족으로, 옹기종기 몰려 살고 있었다. 승용차가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마을사람 대여섯 분이 다가왔다.
그분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어랑촌 전적지와 전적비 위치를 물었더니, 마을 뒷산 계곡이 모두 전적지이며, 뒷산에 올라가면 가장 격전지였던 천리봉도 보인다고 했다. 또 뒷산 비탈에는 전적비도 있다고 했다.
바쁜 마음에 단걸음으로 뒷산에 뛰어올라 천리봉은 카메라에 담았으나 어랑촌 전적비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산등성이에서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한참을 헤맨 끝에 간신히 전적비를 찾았다.
산중턱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은 붉은 색으로 “漁浪村抗日遊擊根據地”(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로 씌어 있었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와 화룡(和龍)시 인민정부가 세웠다고 기록돼 있었다.
나와 이 선생이 돌비석에 술잔을 드리고 한참 절하고 있는데 그제야 한 기사가 헐떡이며 다가왔다.
“나이 드신 선생님들, 어쩌면 그렇게 산을 잘 타세요. 젊은 제가 따를 수가 없네요.”
하긴 출국 후 엿새째 계속 강행군이요, 짧은 수면 시간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답사기간 내내 매일같이 몸이 가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