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도, 그 유래도 아름다운 어랑촌 마을

항일유적답사기 (21) - 어랑촌 전적지

등록 2003.05.21 12:00수정 2003.05.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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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비석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비석 ⓒ 박도

어랑촌

7시 20분, 길가 시골사람들에게 몇 차례 물은 끝에 어랑촌(漁浪村)을 찾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 어랑촌 전적지는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어랑촌!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한 격전지답지 않게 마을 이름이 참 예뻤다.

이 어랑촌 마을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漁浪社) 마을사람들이 이곳에 집단으로 옮겨와서 개척한 마을로, 이주민들이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이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이 마을사람들의 갸륵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a 그 이름도 아름다운 어랑촌 마을.

그 이름도 아름다운 어랑촌 마을. ⓒ 박도

어랑촌 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아침부터 어랑촌 마을을 중심으로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이날 어랑촌 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의 전력을 투입하였다.

독립군 측은 백운평·천수평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둔 대한군정서(경술국치 이후 대종교의 重光團이 발전한 항일 무장단체, 청산리 전투 무렵에는 총재 徐一, 부총재 玄天默, 참모부장 李章寧, 사령관 金佐鎭, 교수부장 羅仲昭, 교관 李範奭 등이 맡고 있었음. 서로군정서와 구별하기 위해 ‘北路軍政署’라고도 불렀음) 600여 명과, 완루구 전투에서 승전한 뒤 이곳으로 이동해 온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 1500여 명이 총동원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구체적인 병력은 확인하기 어려우나, 어랑촌 부근에 임시 본대를 두고 이도구〔어랑촌〕삼도구〔청산리〕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 지대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등 주력 5000여 명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다. 그럼에도 투철한 항일 의지로 무장한 우리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게릴라 전술로 20여 분간의 한 차례 전투에서만 일본군 3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a 어랑촌 마을사람들이 지난날의 항일 전적지를 가르쳐주었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우리 동포들이었다.

어랑촌 마을사람들이 지난날의 항일 전적지를 가르쳐주었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우리 동포들이었다. ⓒ 박도

그것은 우리 독립군이 상대를 얕잡아 보며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고지에서 내려다보며 조준 사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 기병대는 천수평 서쪽 고지를 따라 독립군의 측면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포병과 보병은 독립군 진영의 정면에서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상오 9시부터 다시 시작된 일본군의 공세는 해가 질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독립군은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일본군 공세를 적절히 차단하고,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술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李範奭) 장군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일본군 전상자는 1000여 명으로 추산하였고, 박은식(朴殷植) 선생의<韓國獨立運動之血史>(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1200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오늘의 어랑촌은 50여 호 집들이 듬성듬성 어우러진 마을로, 절반 가량의 집들은 아직도 1920~30년 당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토담집에 초가나 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덮어서 허름했고 굴뚝은 홈을 판 통나무였다.

a 어랑촌 마을의 집, 널빤지 담과 통나무 굴뚝이 이채로웠다.

어랑촌 마을의 집, 널빤지 담과 통나무 굴뚝이 이채로웠다. ⓒ 박도

동행한 이 선생은 이런 허름한 옛 집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고국에 대궐 같은 집(안동의 임청각을 말함)을 두고서 남의 나라에 와서 풍찬 노숙을 하거나,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 이런 움집에서 당신 조상들이 살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나마 왜놈들에게 쫓겨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 못하고, 대부분 독립투사들은 온 만주 땅을 동가식서가숙하며 부평초처럼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사람들은 아직도 대부분 조선족으로, 옹기종기 몰려 살고 있었다. 승용차가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마을사람 대여섯 분이 다가왔다.

그분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어랑촌 전적지와 전적비 위치를 물었더니, 마을 뒷산 계곡이 모두 전적지이며, 뒷산에 올라가면 가장 격전지였던 천리봉도 보인다고 했다. 또 뒷산 비탈에는 전적비도 있다고 했다.

바쁜 마음에 단걸음으로 뒷산에 뛰어올라 천리봉은 카메라에 담았으나 어랑촌 전적비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산등성이에서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한참을 헤맨 끝에 간신히 전적비를 찾았다.

산중턱 화강암에 새겨진 비문은 붉은 색으로 “漁浪村抗日遊擊根據地”(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로 씌어 있었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와 화룡(和龍)시 인민정부가 세웠다고 기록돼 있었다.

나와 이 선생이 돌비석에 술잔을 드리고 한참 절하고 있는데 그제야 한 기사가 헐떡이며 다가왔다.

“나이 드신 선생님들, 어쩌면 그렇게 산을 잘 타세요. 젊은 제가 따를 수가 없네요.”

하긴 출국 후 엿새째 계속 강행군이요, 짧은 수면 시간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답사기간 내내 매일같이 몸이 가뿐했다.

a 어랑촌에 있는 또하나의 전적비  '십삼용사기념비'

어랑촌에 있는 또하나의 전적비 '십삼용사기념비' ⓒ 박도

이는 아마 정신 무장 탓일 게다. 선열들이 망국민이 되어 이국 땅에서 바람결에 찬밥 먹고 이슬 잠을 자며 떠돌 때를 생각한다면 지금의 답사 여행이야말로 얼마나 호사스런 여행인가?

산을 다 내려온 밭머리에 ‘십삼용사기념비’가 서 있었다. 항일 기념비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아 묵념하고 사진 한 컷을 찍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별 언급이 없었으나, 나중에 연변에서 산 <중국조선족력사상식>이란 책에서 '어랑촌 13용사들은 어떻게 싸웠는가' 편을 찾아보았다.

1933년 1월 19일 중공화룡현 항일무장유격대 중 13명이 일제 연합토벌대를 물리치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곳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독립운동사에서도 여태 좌우익을 나눠야 하는 현실이 마냥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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